[퍼옴/타쿠] 쟈스민티 上 쟈스민 티 <1> 뜨거운 열에 꽃을 피우는...... "이도진, 체육복 좀 빌려주라" 도진이 놈은 '또냐?'라는 눈으로 쳐다본다. "빌릴 데가 나밖에 없냐?" "딴 놈들건 짧아서 못 입어. 어차피 빌려줄 거면서 잔소리는..." "점심시간에 갖다 주마..." 도진이 손에서 체육복을 낚아채서 교실로 돌아왔다. 사물함에서 썩어가던 체육복을 꺼내서 갈아입는 놈들을 보니 눈살이 찌푸려진다. 더러운 놈들...상종도 하기 싫다. 그에 반해 녀석의 체육복에서 희미한 장미향이 난다. 향수 냄새가 아닌 언제나 녀석에게 베어있는 체향.... 이 기분 좋은 냄새 때문에 매번 녀석의 반까지 빌리러 가는 수고가 하나도 아깝지 않다. "체육복에 코 처박고 뭐하냐?" 움찔. 옆으로 쳐다보자 성재 녀석이 인상을 찌푸리고 있다. "새끼...변태스럽기는....." 약간 민망했지만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옷을 갈아입었다. 그러고 보니 성재 녀석도 언제나 깨끗한 체육복이다. 세탁해서 가져올 정도로 세심한 놈은 아닌데..... "넌, 누구한테 체육복 빌리냐?" 내말에 성재 녀석은 코웃음치며 말한다. "빌리긴.....쨔샤.....꼬봉 좋다는 게 뭐냐?" "너도 매번 빌리러 다니지 말고 그냥 그놈 꼬봉으로 만들어 버려.." ......이도진과 꼬봉이라......도저히 상상이 안된다. 꼬봉의 효용성에 관한 성재의 일장 연설을 들으면서 운동장으로 나오니 다른 녀석들은 벌써 줄을 맞춰 앉아 있다. 체육의 뜨거운 눈길을 받으면서 뒤쪽으로 가 슬며시 앉는데 바닥을 구르고 있는 농구공이 보인다. "각 팀 5명에 전반, 후반, 15분씩이다." "지원자는 앞으로 나오도록..." 체육의 말이 끝나자 잠시 웅성거리더니 몇 놈이 앞으로 나가는 게 보인다. 더운 날씨에 나갈까 말까 망설이고 있는데 성재 녀석이 말을 걸어온다. "이지후. 오랜만에 함 붙자." "뭐 걸건데?" "특제 돈까스에 라면." 쪼잔한 놈이 특제 돈까스를 걸다니...자신 있단 소리겠지... "특제 돈까스에 라면에 딸기 우유 추가다." 호각 소리가 울리고 경기가 시작되었다. 우리 쪽이 선공이었기 때문에 천천히 드리블하면서 전진하는데 성재 녀석이 바짝 마크해 온다. 앞으로 파고드는 척 훼이크를 걸면서 그대로 슛을 쏘자 내 손을 떠난 공이 아름다운 포물선을 그리며 골대 안으로 들어간다. "재수 없는 놈. 갑자기 슛을 하면 어쩌냐?" "억울하면 똑같이 하던지..." 궁시렁거리던 성재 녀석은 빠르게 드리블하면서 골밑으로 파고들어 골을 넣고는 내 쪽을 쳐다보며 씩 웃는다. 단순한 놈... 드리블 하는 척 하며 내 옆에 있는 놈에게 패스했다. "툭" 세상에.....진짜 황당하다. 내 옆에 있던 놈은 내가 패스하자마자 눈을 감아버렸다. 날아간 공은 녀석의 다리를 맞고 땅을 한번 튀기곤 상대편으로 넘어간다. 뭐 저런 놈이 다 있어....황당해서 말도 안나오려는데 성재가 뛰어가면서 말한다. "쯧....안됐지만 저놈이 너희 편인 이상 진거나 다름없다." 경기는 계속 진행되었고 성재 녀석이 말한대로 그 놈의 멍청한 짓거리도 계속되었다. 성재 놈 만으로도 벅찬데 다른 놈들 까지 나를 마크하기 시작해서 어쩔 수 없이 패스하면 무슨 이유인지 그때마다 그 비실비실하고 조그만 놈이 내 근처에 있었다. 그 녀석은 수많은 패스 중에 한번도 잡아내지 못했고 그때마다 나의 짜증은 쌓여갔다. 경기 내내 계속 내 주위에서 얼쩡거리면서 발목을 잡는 녀석이 너무나 짜증스러워져서 마침내 나는 패스하는 공에 잔뜩 힘을 실었다. 예상대로 공은 녀석의 얼굴을 그대로 직격했고 그 충격으로 그 녀석은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걸리적 거리지 말고 꺼져!" 녀석을 바라보며 또박또박 말해줬다. "야...성질 많이 죽었다. 이지후." "나 같으면 예전에 걷어차 버렸다." 성재 녀석은 그렇게 내뱉으며 땅에 구르고 있던 농구공을 주워 올린다. 경기는 속행 되었고 방해물이 없어진 덕분에 점수차는 금방 줄어들어 결국 4점차로 우리팀이 이겼다. 만약 졌으면 오늘 살인났을 지도 모른다. 땀을 흠뻑 흘려 끈적끈적해져서 머리를 감고 수건에 물을 적셔 몸을 닦아냈다. 차가운 수건으로 몸을 닦아내자 부드러운 미풍이 불어와 내 몸을 기분 좋게 감싼다. 미리 준비 해두었던 교복셔츠로 갈아입고 수돗가를 나오는데 아까의 그 짜증나는 놈이랑 마주쳤다. 이놈 양호실 갔던 거 아니었나? "미안해.." "............" 녀석은 고개를 푹 숙인 채 땅만 쳐다본다. 사과는 얼굴 쳐다보면서 해야 하는 거 아닌가? "너.....할 맘도 없으면서 왜 지원한 거냐?" 나는 진심으로 그것이 궁금했다. 지명당한 것도 아니고 자신이 하고 싶어서 나온 것이라면 아까의 그 플레이는 도대체 뭐란 말인가? 미풍은 어느새 숨이 막히도록 더운 바람으로 변해 몸에 척척 감긴다. 녀석의 대답을 기다리며 꽤 오랫동안 햇빛 속에서 기다렸지만 녀석은 입술을 앙다문 채 바닥만 내려다보고 있다. 이 자식 사람 열 받게 하는데 정말 탁월한 소질이 있군. "너 한번만 더 내 앞에서 알짱거리면 그대로 밟아 버린다." 숨 막히는 더위와 짜증나는 녀석의 태도에 인내심이 바닥나서 그렇게 차갑게 내뱉고는 굳어 있는 녀석을 뒤로 하고 교실로 향했다. 쟈스민 티 <2> 뜨거운 열에 꽃을 피우는...... 성재 녀석이 피눈물 흘리면서 사준 특제 돈까스와 라면을 맛있게 먹고 내가 제일 좋아하는 딸기 우유를 마시면서 도진이 반으로 향했다. 뒷문으로 들어서니 녀석의 잘생긴 뒤통수가 보인다. "잘썼다." "또 땀에 절여놨냐?" 무표정한 얼굴을 약간 찌푸리면서 말한다. "땀은 무슨......향기로운 나의 체취라면 조금 묻어 있을 지도 모르지..." "..............." 손가락을 뻗어 부드러운 적갈색 머리카락을 감아서 돌리자 도진이의 단정한 미간에 생겼던 주름이 사라진다. 의외로 스킨쉽에 약한 녀석....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녀석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주는 느낌이 좋아서 한참을 그러고 있는데 주위의 따가운 시선이 느껴진다. 시선이 느껴지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자 우리 쪽을 쳐다보고 있던 녀석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인다. 왜 쳐다보는 거지? 머리카락 만지는 거 첨보나? 내가 고개를 돌리자마자 다시 우리 쪽을 힐끔거린다. 계속 이러고 있고 싶지만 저 시선들이 신경 쓰이는군.. "담에도 잘 부탁한다. 이도진." 아쉬움을 느끼면서 녀석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에서 손을 떼었다. "그러던지..." 무심한 듯 행동하지만 월요일이면 언제나 나를 위해 깨끗이 세탁한 체육복을 가져오는 다정한 놈.... "또 이도진 반에 갔다 왔냐?" "어." 성재는 보고 있던 만화책을 덮고는 나를 빤히 쳐다본다. "왜?" "아니........" "중 3때부터지? 그녀석이랑 가까워진 거....." "그녀석 상대하기 어렵지 않냐?" "별로...." "나는 이도진이 웃거나 화내는 거 본적이 없다." "언제나 무표정 무감각에 뭐든 흥미 없다는 표정이잖냐. " 아닌데,,,, 확실히 표정이 없는 편이긴 하지만 희미하게 웃기도 하고 찡그리기도 하는데.... 다른 녀석들이 알지 못하는 도진의 모습을 나만 알고 있다는 것이 왠지 모르게 기쁘다. "네 놈이 겉모습만 쿨한 놈이라는 걸 모르는 새끼들이 너랑 이도진이 같이 다니는 것 보고 얼음과 드라이아이스의 만남이라고 수군대는 건 아냐?" "..금시초문인데." "하긴 너같이 둔한 놈이 뭘 알겠냐? 어쨌든 너희들이 친한 건 7대 불가사리다." 그렇게 말하고는 성재는 만화책으로 다시 눈을 돌린다. 얼음이라...... 역시 다른 사람들 눈에 그렇게 비치는 건가? 타인에게 비치는 내 모습은 또 다른 나임에 틀림없다. 스스로가 만들어 낸 또 하나의 나는 이제는 분리해 낼 수 없이 완전히 나와 일체화되어.......가끔씩은 오히려 그것이 내 본질처럼 느껴질 때도 있다. 물론 성재 녀석이나 도진이와 있을 때는 그것이 표면화되지는 않지만........ 그건 그렇고 유성재.. 불가사리가 아니라 불가사의다. 무식한 놈이 문자 쓰기는...... 쟈스민 티 <3> 뜨거운 열에 꽃을 피우는...... 식곤증으로 인한 나른함과 적당한 햇빛...... 나도 모르게 눈꺼풀이 스르르 감긴다. 담탱이 시간만 아니라면 벌써 엎어져 잤을텐데... 다른 놈들도 연신 꾸벅거리면서도 책상에 엎드리는 놈은 보이지 않는다. 담탱이 성격이 좀 지랄 맞아야지..... 찍히는 게 싫어서 최대한 버텨보았지만 더 이상은 도저히 무리다. "화장실 갖다 오겠습니다." 나를 향해 시끄럽게 짖어대는 담탱이를 무시하고 교실에서 나와 미술부로 향했다. 어차피 오래전에 찍힌 거 한 번 더 찍힌다고 해서 변하는 건 아무것도 없지...... 내려앉기는 했지만 의외로 푹신한 소파에 누워 눈을 감으니 정말 천국이 따로 없다. 낡은 소파가 주는 안락한 느낌에 나는 비로소 밀려오는 단잠에 기분 좋게 빠져 들 수 있었다. "일어났냐?" 낮은 허스키....도진이 녀석이군... "...어....지금 몇시냐?" "글쎄.......7교시 수업이 끝난 건 확실한데..." 씨발. 담탱이한테 죽었다. "좀 깨워주지 그랬냐?" "기분 좋게 자는 것 같길래...." 몸을 일으키자 여기저기가 쑤셔댄다. 소파에서 자면 이렇다니깐.....(언제는 기분 좋다며? -.-;) "움직이지 마라..." 도진이 녀석이 굉장히 진지한 눈을 하고선 말한다. 그림 그리는 중이셨군...... 어쩔 수 없이 다시 소파에 누워 아까와 비슷한 자세를 취하고 녀석을 바라보자 도진은 만족스러운 듯 입꼬리를 살짝 올리고는 말한다. "눈도 감아." 공짜로 부려먹으면서 까다롭기는... 고요한 가운데 서걱거리며 종이와 마찰하는 목탄소리가 꽤 기분 좋다. 진지한 눈으로 나를 그리는 도진이를 보자 중학교 때가 생각난다. 중학교 때 녀석은 상당히 조용한 놈으로 화려하게 노는 나와는 완전히 별개의 세계에 살던 놈이었다. 2년간 같은 반이였지만 부딪히는 일 없이 서로에게 무관심하게 지냈는데 어느 미술시간 이후로 우리의 관계는 달라지기 시작했다. 그날은 인물화를 그리는 날이었는데 우연히도 도진이 녀석과 내가 짝이 되었다. 나는 정말 심각하게 그림을 못 그리기 때문에 잘난 녀석의 얼굴을 에어리언 처럼 그렸던 걸로 기억된다. 그래도 나름대로 열심히 그리고 있는데 따가운 시선이 느껴져서 쳐다보자 도진이 녀석이 내 그림을 보면서 심하게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나 못지않게 지독하게 무표정한 놈이 저런 표정을 짓다니......되게 신기하다. 그래도 그렇지. 그렇게 노골적으로 찡그리는 건 실례 아니냐? 그러는 너는 얼마나 잘 그렸냐? 나 역시 똑같이 얼굴을 확 구겨줄 생각으로 녀석이 그리고 있던 것을 빼앗았다. 민망할 정도로 얼굴을 찌푸려 줄 생각이었는데..... 정말로 태어나서 그렇게 잘 그린 그림은 처음 봤다. 하얀 스케치북 속에는 섬세한 검은 선으로 이루려진 내가 살아 숨쉬고 있었다. 멍하게 녀석의 그림을 들여다보고 있는데 녀석이 말했다 "발로 그려도 너보다는 잘 그리겠다. 이 괴물이랑 내가 어디가 닮았냐?" 빈정거리는 말과는 달리 녀석은 환하게 웃고 있었다. 언제나 무표정한 얼굴이었는데.......정말 심장 떨릴 정도로 예쁘게 웃는다. 보는 이로 하여금 순수한 호감을 불러일으키는 미소....... 지금도 기분 좋은 날이면 가끔 보여주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무표정하고 별로 웃지 않는 놈이라 그 빈도수가 상당히 뜸하다. "드르륵" "야. 이지후 집에 안가냐?" 미술실 입구에 성재가 가방을 삐딱하게 맨 채 서있다. 아 저건 내 가방..... 성재는 내 쪽으로 저벅저벅 걸어오더니 소파에 가방을 던지고는 털썩 주저앉는다. 내 가방까지 몸소 가져와 주다니 부탁할 것이 있는 모양이지...유성재. "너 오늘 저녁에 시간 있냐?" "왜?" "알바 할 생각 없냐? 시급이 4000원인데...." ",............." 시급 4000원이라.... 생각지 못했던 성재의 등장에 집중이 되지 않는지 도진이 녀석이 살짝 인상을 찌푸리더니 스케치북을 덮고 일어선다. 이제 움직여도 되는 건가? 성재 녀석은 정말 끝내주는 알바라며 침을 튀기며 열변을 토한다. 보나마나 네 녀석 대타 뛰게 하려는 거겠지...내가 널 모르냐? 마침 배고팠는데 도진이 놈한테 밥이나 사달라고 해야겠다. "이도진...가방 챙겨서 눈썹 휘날리게 교문으로 나와라. 나 배고프다." 도진이는 나와 성재를 흘끗 쳐다보더니 스케치북을 들고 미술실을 나간다. 저 눈은 귀찮지만 알았다는 거군.....이왕이면 말로 해주면 안되나? "야. 이지후. 너 지금 내 말 씹었냐?" "....응?......" "씨발. 할거야, 말거야?" "네 놈 대타는 안해..." "내 대타가 어때서?" 역시 대타였군....... ".......말을 말자.........." 성재 녀석이 내 뒤를 따라오며 비 맞은 중놈처럼 혼자서 계속 궁시렁거린다. 이런 녀석이 일진이라니...... 일진이라면 뭔가 멋진 구석이 있어야 하는거 아닌가? 뭐....얼굴은 그런대로 괜찮은 편이고.....주먹도 센 편이지만 쪼잔하고 말 많고 카리스마라는 것 눈 씻고 봐도 없는 놈인데.....왜 이런 놈이 일진인지 도무지 이해가 안간다. 운동장으로 나오자 교문에 기대 서 있는 도진이가 보인다. 빠르기도 하지..... 저 녀석 교실에서 교문까지는 상당히 멀지 않나? 내키지 않지만 가준다는 눈을 한 것치고는 너무 빨리 나온 것 아니냐? 이도진. 하여간 솔직하지 못한 놈.... 쟈스민 티 <4> 뜨거운 열에 꽃을 피우는...... 어제 하루 종일 땡땡이 친 것 때문에 담탱이한테 열라 쪼이고 교무실을 나오는데 어떤 녀석이랑 부딪혔다. 가뜩이나 기분도 안 좋은데...... "씨발, 눈깔은 폼으로 달고 다니냐?" 적반하장도 유분수지....녀석의 태도에 열이 뻗친다. 쌍욕을 하면서 일어서던 녀석의 얼굴이 내 얼굴을 보자마자 순식간에 굳는다. "아....이....지후..." 가만히 있어도 차가워 보이는 내 외모가 지금 그 가치를 100% 발하고 있을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미...미안....넌 줄 몰랐어....." 녀석은 어줍잖게 사과하며 뒷걸음질치더니 잽싸게 도망간다. 재수가 없으려니 별 놈이 다 시비를 거네.... 짜증이 나서 담배 한대 피려고 옥상으로 올라가자 아는 얼굴들이 진을 치고 앉아있다. "어...지후 선배 오랜만이네요..." "...어..." 방긋 웃으며 싹싹하게 말을 거는 이놈은 성재 녀석이 가장 아끼는 후배 놈이다. 이름이 뭐랬더라? 덩치에 엄청 안 어울리는 이름이었는데..... 담배를 베어 물자 녀석이 잽싸게 불을 붙여준다. 정말 싹싹한 놈일세... "너 이름이 뭐냐?" "...이....소희....인데요..." "..............." "...크크크,,,,큭큭....." 맞다...이소희..... 그냥 들어도 웃긴 이름인데 본인이 직접 말해주니 진짜 엽기다. 어떻게 이런 떡대한테 그런 이름을 붙일 수가 있지? 배가 아플 정도로 한참을 웃고 있는데 소희란 녀석이 나를 뚫어지게 쳐다본다. 아....너무 노골적으로 웃었나.. "...미안...." "아뇨....익숙한데요 뭐....근데 선배 웃을 줄도 아는군요...." 씹. 나는 인간도 아니냐? 도진이 놈과는 달리 난 잘 웃는다고...(그거 정말이냐? ㅡ.ㅡ;;) "아...저기.....뭐랄까....언제나 좀 차가워 보여서....." "..............." "....나 실제로는 하나도 안 차가운데...." "................" 물을 끼얹은 듯 주위가 조용해진다. 말도 안된다고 써있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는 녀석들의 모습에 조그맣게 한숨이 나온다. 내 이미지로 굳어버린 듯한 차갑고 냉정해 보이는 모습이 이럴 때는 가끔 씁쓸해진다. 담배를 마저 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민망하긴 하지만 그래도 이녀석 덕분에 꿀꿀했던 기분이 많이 나아진 것 같다. "담에 보자..." 뻥해져 있는 녀석들을 뒤로하고 천천히 옥상에서 내려왔다. "야.....너 봤냐....." "씨발, 난 심장 떨어지는 줄 알았다." "세상에 눈웃음 까지 치더라....." "뭔가 무지 비싼 걸 본 것 같지 않냐?" "조용히 해...." 아까까지의 싹싹하고 귀여운 모습은 어디를 갔는지 잔뜩 굳은 얼굴을 한 이소희가 한마디 하자 수군대던 녀석들이 일시에 조용해진다. 성재형이 유난히 아낀다 했더니...... 상상도 못했던 지후의 모습에 소희는 마음이 무거워 지며 씁쓸하게 담배에 불을 붙인다. 쟈스민 티 <5> 뜨거운 열에 꽃을 피우는..... 고등학교는 정말 너무나 쓸데없는 제약이 많은 것 같다. 다행히도 우리 학교는 복장면에서 그다지 까다롭게 구는 건 아니지만 보충수업이나 야간 자율 학습 따위로 사람을 귀찮게 한다. 하기 싫다는 사람 억지로 잡아놓고 도망가면 다음날 뭐같이 두들겨 패고......정말 싫다. 누나를 실망시키기 싫어서 공부는 하는 편이지만 가끔씩 정말 이 갑갑한 곳에서 벗어나고 싶다. 물론 결국은 내 맘대로 하고 있지만....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 어느새 잠들었나 보다. 둔탁한 소리가 나서 눈을 뜨자 도진이가 어떤 조그만 녀석을 밟고 있다. 퍽.퍽.퍽.퍽.퍽 세상에.....이도진이 폭력을....... 처음 보는 녀석의 모습에 나는 상당히 놀랐다. 긴 다리를 뻗어서 무참하게 쓰러져 있는 녀석의 배를 가격한다. 때릴 곳도 없어 보이는 작은 녀석이 처참하게 밟혀진다. 얼마나 터졌는지 눈은 부어올랐고 입술은 완전히 터져서 피 떡이 되어있다. 도진의 낯선 모습에 너무 놀라 나는 말릴 생각도 없이 멍하니 보고 있었다. 평소에 찾아볼 수 없는 격정과 분노에 휩싸여 발길질을 하는 녀석은 묘하게 아름답게 보인다. 한참을 그렇게 홀린 것처럼 멍하니 바라보다 계속되는 발길질에 피를 토하는 조그만 녀석의 모습에 내 이성은 돌아왔다. "진정해라. 이도진." 어깨를 끌어안으며 말하자 계속되던 무자비한 발길질이 멈춰진다. "진정해...." 귓가를 자극하던 거친 숨소리가 조용히 가라앉아 간다. "................" "아무데서나 자지마라. 이지후." 무표정 대신 분노를 담은 적갈색 눈동자. 감정을 억누른 듯 미미하게 떨리는 목소리. 분한 듯이 깨물고 있는 새빨간 입술 모든 것이 너무나 생소하다. "그래...알았어.....안 그럴테니까 그만 화 풀어라." 흥분해 있는 도진이를 달래면서 바닥에 널부러져 있는 놈을 쳐다보자 녀석도 내 시선을 느꼈는지 나를 똑바로 쳐다본다. 눈가가 심하게 부어서 얼굴을 알아볼 수는 없지만 어디선가 본 듯한 눈빛. 생각났다. 농구할 때 짜증나게 걸리적거리던 놈. 내 눈앞에 알짱거리지 말라고 경고 했을 텐데......머리 나쁜 새끼.. 환자를 보고 모른척하고 지나갈 만큼 인간성이 나쁘진 않지만 내 경고를 무시한데다 도진이 녀석을 여기까지 몰아붙인 녀석이 괘씸해져서 필사적으로 도움을 구하는 눈빛을 무시하고 돌아섰다. "손 이리내라" 예상대로 손 여기저기가 까져 있다. 하얀 손에 난 생채기를 보자 인상이 찌푸려진다. "쯧. 생전 싸움도 안하는 자식이 주먹 쓰니까 이렇잖아." 까진 상처에 조심스럽게 연고를 바르고 대일밴드를 붙이는 동안 도진은 아무말없이 침묵을 지킨다. 대충 치료를 끝내고 고개를 들자 나를 똑바로 쳐다보는 적갈색 눈동자와 마주쳤다. "이유.....안 물어보냐?" "됐다. 어차피 그놈이 맞을 짓 했겠지. 그 새끼 묘하게 신경 건드리거든..." "................" ".....내가 물어봐 줬으면 좋겠냐?" ".......별로...." 예의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무심한 표정이다. 완전히 돌아 왔구나 이도진. 다행인 듯 하면서도 마음 한 구석에서는 아쉬움이 느껴진다. 생소하긴 했지만 아까의 네모습도 꽤 좋았는데.......... 쟈스민 티 <6> 뜨거운 열에 꽃을 피우는..... 보충수업이 끝나자 주경민이 교실로 들어왔다. 오늘 하루 동안은 병원에 누워있을 줄 알았는데......의외로 통뼈인가 보군.... 꼴을 보니 눈가가 시퍼렇게 부은게 아까보다 더 심각해 보인다. "저 새끼 화려하게 터졌네...." ".........." "이지후.....설마 네가 그랬냐?" "...아니......" 반 아이들이 자기를 쳐다보면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지 주경민은 비실거리면서 고집스럽게 가방을 싸더니 한참동안 움직이지 않고 자리에 서있다. 가방 다 쌌으면 빨리 집에나 갈 것이지......얼굴빛이 새파란 것이 저러다 쓰러지겠다. 안 그래도 작은 녀석이 시퍼렇게 멍든 얼굴을 하고 비실대는 걸 보니 영 마음이 안 좋다. 차라리 내가 때렸으면 이렇게까지 신경 쓰이지는 않을 텐데...무언가를 기다리듯 그렇게 가만히 애처롭게 서 있는 녀석이 불편해져서 반에서 나와 버렸다. 기분이 꿀꿀해져 있는데 핸드폰이 울린다. 누나가 이 시간에 왠일이지...... "여보세요." "지후야....오는 길에 시장 좀 봐와라...먹을 거 다 떨어졌다." "야간 자습 있는데...." "언제부터 네가 그런 사소한 데 신경 썼니?" "나 시장 볼 시간 없으니까 아무거나 알아서 사와." "끊는다." 여전히 누나는 자기 할말만 하고 끊어버린다. 가뜩이나 담탱이한테 찍혔는데.... 에라 모르겠다. 삼겹살을 좀 사갈까? 고기 먹은 지도 오래됐고..... 포장되어 있는 삼겹살을 집으려는데 누군가가 먼저 낚아채 간다. 씨발....누구야.... 열 받아서 째려보자 아주 인상 나빠 보이는 아줌마가 전리품을 획득한양 아주 당당한 포즈로 서있다. 이래서.....한국 아줌마들이 싫다니깐..... 너무 짜증이 나서 돌아서려는데 그 아줌마가 나를 잡는다. 뭐야......아줌마....한판 뜨자는 거야? "학상. 이거 살라고 했든 거 아이가? 괜찮으니까...갖고 가라." 예상 못한 아줌마의 태도에 얼굴이 붉어진다. 겉모습만 보고 판단해서 속으로 욕한 내 자신이 너무 부끄럽다. 삼겹살을 받으려고 손을 내미는데 갑자기 아줌마의 우락부락한 손이 내손을 세게 쥐어온다. "내가 왠만해선 양보 안하는 디...학상은 참 내 맘에 드는구먼..." "어찌 이래 잘생겼을까? 내 첫사랑하고 똑같네..." 잡혀진 손이 아파온다. 얼마나 세게 쥐었는지 피가 통하지 않아서 손등이 빨갛다. 게다가 이 아줌마 목소리는 왜 이렇게 커? 내 볼까지 만지려 드는 아줌마에게서 간신히 벗어나 시장 보는 걸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늦었네...." "젠장맞을 과장새끼가 자꾸 쓸데없는 걸 시키잖아....난쟁이 똥자루 주제에....." "아유~짜증나..." 스타킹을 벗으면서 과장 욕을 해댄다. 누나는 27살에 꽤 좋은 회사의 대리로 있다. 성격은 좀 드세지만 그래도 예쁘고 똑똑해서 남자들한테 매일 데이트 신청 받을텐데 내게 저녁을 만들어 주려고 언제나 일찍 집에 돌아온다. "누나...주변에 괜찮은 사람 없어?" "너 지금까지 뭐 들었냐? 재수 없게도 내 주변에는 난쟁이 똥자루들뿐이다. 젠장." "어 삼겹살 사왔네....잘됐다. 마침 땡겼거든..." 흥얼거리면서 저녁을 준비하는 누나가 새삼 고맙게 느껴진다. 누나에게 애인이 생기면......나 많이 섭섭할지도..... 쟈스민 티 <7> 뜨거운 열에 꽃을 피우는..... 아직 6월인데 지독하게 덥네.... 이상 기후라고 하더니 정말 날씨가 미쳤군.. 에어컨 있는 도진이 놈 집에 가서 개겨야겠다. 이런 더운 날 움직이는 게 무지무지 귀찮았지만 시원한 바람에 대한 강렬한 욕망이 무거운 다리를 억지로 움직이게 했다. "누구세요?" "지후 오빤데..." 덜컹하고 열리는 소리와 함께 현관문이 열리고 주연이가 빼꼼이 내다본다. "어...지후 오빠 오랜만이네....." "도진이는?" "오빠 학원 갔어....들어와." 아~시원하다. 역시 오길 잘했어.... 시원한 에어컨 바람을 맞으며 거실 소파에 앉아 있는데 주방에서 주연이가 소리친다. "오빠, 차 마실래?" "콜라 없냐?" "응. 대신 맛있는 차 끓여 줄께." 이 더운 날에 무슨 차냐.......얼음 잔뜩 넣은 콜라가 마시고 싶다. "그런데 주연이 넌 여기 왠일이냐?" "엄마가 한 번 들여다보라구 해서....아빠도 안계신데.....오빠가 혼자 있는 게 걱정 되나봐..." "그렇게 걱정되면 직접 들리면 될 걸....어른들은 솔직하지 못하다니깐...." 그녀석의 무표정한 얼굴을 보면 아무리 부모라도.....쉽게 발걸음 할 수 없겠지..... 겉으로 아무렇지 않은 얼굴을 하고 있더라도 부모의 이혼은 자식에겐 지울 수 없는 상처인거다.......외로움으로 심장이 곪아 들어가는 아픔...... 경우가 다르긴 해도 그렇기 때문에 녀석과 나는 기묘한 동질감을 느끼고 있는지도...... 고급스러워 보이는 찻잔에 뜨거운 물을 쪼르르 따르자 어디선가 많이 맡아본 익숙한 향기가 거실에 은은히 퍼진다. 언제나 녀석에게서 나는 엷은 장미향..... "쟈스민 티야....아빠가 중국에서 보내주신 건데 향이 정말 좋다." 쟈스민이라고? 장미향인줄 알았는데..... "여기 찻 속에 떠있는 조그만 구슬 같은 거 보이지?" "이건 쟈스민 안에 들어 있는 '마리화'라고 하는 꽃인데 이렇게 뜨거운 물을 부으면 천천히 꽃이 피면서 그 안에 갇혀있던 향기가 퍼지는 거야....." "굉장히 천천히 피긴 하지만 너무 예쁘고 신기하지?" 마치 연꽃이 만개하는 것처럼 찻잔 속에서 천천히 벌어지는 꽃봉오리가 입술에 닿을 듯 말 듯 떠다니며 향기를 피워낸다. 평소의 엷은 향기가 아닌 진한 쟈스민 향기는 기묘한 이질감을 준다. 나와 같은 느낌을 받으며 녀석도 이 차를 즐겼을까? 문득 도진이가 이 쟈스민 티를 마시는 모습이 보고 싶어 졌다. 몸에 향이 배일 정도로 쟈스민 티를 좋아하는 녀석이니 평소의 무표정한 얼굴이 아닌 아주 특별한 표정으로 차를 마실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동동 떠다니며 내 입술을 자극하던 꽃잎을 차와 함께 마셔버리자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꽃잎의 느낌이 상당히 만족스럽다. "세상에...지후 오빠 그건 먹는거 아냐...그냥 향을 우려내는 거라구." "어, 그러냐,,,,,내가 뭘 알아야지...." 내 대답에 주연이는 어떻게 그런 기본적인 것을 모를 수가 있냐는 얼굴이다. 좀 민망하군.... "그런데 너 그렇게 예쁘게 하고 어디 갈 생각이었냐?" "아 참 깜빡했네. 오늘 친구가 소개팅 시켜 준다고 했거든." "그래? 괜찮은 놈 하나 물어라." "글쎄, 오빠 같은 사람이 나온다면 가능하겠지만....." "칭찬 고맙다." "도진 오빠 조금 있다 올꺼야. 그동안 TV나 보고 있던지..." "아 그리고 배고프면 대충 냉장고에서 꺼내먹어...." "오냐." 부산을 떨던 주연이가 나가자 다시 집안에는 정적이 흐른다. 몸을 소파에 파묻고 눈을 감자 아까의 쟈스민 향이 은은하게 코끝을 자극해 온다. 왠지 잠이 오는 것이 수면 효과까지 있는 모양이다. 쟈스민 티 <8> 뜨거운 열에 꽃을 피우는... 한참을 잤는지 주위가 깜깜하다. 뭐야 이 녀석 아직 안온거야? 익숙하지 않은 공간에서 전기 스위치를 찾기 위해 나는 두 번이나 넘어져야 했다. 벌써 8시군.... 배고픈데 이녀석은 왜 이렇게 안오는 거야? 쑤셔대는 배를 쥐고 먹을 것을 찾기 위해 냉장고를 열었다. 주연아... 배고프면 대충 냉장고에서 꺼내 먹으라고 하더니 먹을 게 하나도 없잖아. 그나마 생으로 먹을 수 있는 거라곤 내가 제일 싫어하는 당근 밖에 없다. 무지무지 싫었지만 너무 배가 고파서 할 수 없이 당근을 씻어서 껍질을 벗겨 씹어 먹는데... 젠장 왜 이렇게 맛이 없냐? 당근 2개를 억지로 꾸역꾸역 먹고 나자 배를 콕콕 쑤시는 아픔이 어느 정도 가신다. 당근 따위로 배를 채우다니. 내 생애 이렇게 짜증나는 날은 처음이다. 배도 안 아프니까 볶음밥이라도 만들어 볼까? 냉장고에 있는 양파와 피망과 감자를 꺼내 차례로 썰고 정말 꺼려졌지만 당근도 썰었다. 후라이팬에 기름을 두르고 가스 불을 켜는데 열쇠로 문을 따는 소리가 들린다. "이도진 너 왜 이렇게 늦게 오냐?" 주방으로 들어오는 도진에게 원망스러운 목소리로 말하자 녀석은 아무 표정 없이 힐끗 쳐다보더니 냉장고 문을 열고 생수를 꺼내어 마신다. "카레 만드냐?" "눈은 뒀다 뭐하냐? 볶음밥이다." "................" "......가로 세로 1cm정도는 되어 보이는데....." "시끄러, 이거 써는데 얼마나 힘들었는지 아냐?" 썰어놓은 것을 후라이팬에 넣고 볶는데 좀 크게 썰어서 그런지 야채가 잘 익지 않는다. 정말 되는 일이 없군. 그렇게 한참 야채를 볶다가 달걀을 풀어서 스크램블 한 뒤 밥을 넣어 고슬고슬 볶고 소금 후추로 간을 했다. 뭐, 일단은 볶음밥 냄새가 나네... "야. 이도진 밥먹자." 볶음밥을 그릇에 담아 식탁에 놓고 이것저것 냉장고에서 반찬이 될 만한 것을 꺼내고 있는데 그 사이에 샤워를 했는지 젖은 머리를 한 도진이 식탁으로 다가와 앉는다. 뚝. 뚝. 또르륵. 물기를 덜 닦았는지 물방울이 머리카락 끝에 맺혀있다 녀석의 하얀 어깨로 한방울, 한방울 떨어진다. 어깨로 떨어진 물방울이 잠시 동안 쇄골에 고여 있다 다시 아래로 흐른다. 도저히 정신 사나워서 밥을 먹을 수가 없었기에 욕실에서 수건을 가져와 녀석의 머리를 꼼꼼히 닦기 시작했다. 나의 갑작스런 행동에 도진은 힐끗하고 쳐다보더니 다시 밥을 먹는다. 물기를 닦아내자 머리카락은 붉은 갈색 빛을 띄면서 향긋한 샴푸 냄새를 풍기며 코끝을 간질인다. "딱딱해.." 약간 인상을 찌푸린 채 젓가락으로 설익은 당근을 쿡쿡 찌르고 있는 도진이의 모습에 울컥하고 속에서 뜨거운 것이 올라온다. 누구는 배고파서 생 걸로 두 개나 씹어먹었구만.... "그럼 먹지마 새꺄." 배부른 투정을 하는 녀석이 얄미워져서 밥그릇을 빼앗으려 하자 아까까지 젓가락으로 쿡쿡 쑤시고 있던 당근을 재빨리 입에 넣고는 우물거린다. 짜식 진작에 그럴 것이지..... "나 오늘 너희 집에서 자고 간다." 샤워를 하고 나오는데 갈아입을 옷이 없는 것을 깨닫고 할 수 없이 대충 수건을 두르고 나오자 침대에 누워 책을 보는 도진이 녀석이 보인다. "네 팬티랑 옷 좀 빌린다." "어..." 서랍을 열고 팬티와 나시 반바지 등을 꺼내서 갈아입고 있는데 등 뒤로 따가운 시선이 느껴져서 쳐다보자 이도진이 아주 노골적으로 쳐다보고 있다. "뭐냐? 욕구 불만이냐?" ".....그럴지도..." 얼굴 표정 하나 안 바꾸고 대답하는 녀석의 모습에 피식 웃음이 나온다. 나시는 의자에 걸쳐 둔 채 반바지만 마저 입고는 침대 속으로 기어 들어갔다. 녀석의 침대에서도 희미한 장미향....이 아닌 쟈스민 향이 난다. 또 슬슬 졸음이 몰려오는군. "이도진, 오늘 주연이가 쟈스민 티 끓여주더라." "..............." "그거 맛은 별론데 향은 정말 죽이더군...." "..............." "모르고 차 위에 떠있는 꽃잎까지 먹어버렸는데.....주연이가 원시인 쳐다보듯이 보더라..." "............." "뭐 어쨌든........앞으로 중독될 지도......" "............도.....다." 기분 좋게 코를 자극하는 향이 좋은 꿈을 꿀 수 있도록 인도해 줄 것 같다. 뭔가 조그맣게 중얼거리는 나지막한 도진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나는 기분 좋게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쟈스민 티 <9> 뜨거운 열에 꽃을 피우는..... 눈을 뜨자 보기 좋게 근육이 붙은 하얀 등이 보인다. 마른기만 한 줄 알았는데 의외군. 하얗고 뽀얀 피부를 보자 나도 모르게 손이 간다. 녀석의 허리를 감고 있던 손을 들어 가만히 쓰다듬자 촉촉한 피부가 착 감겨온다. 이게 남자피부냐..... 부드럽고 촉촉한 감촉에 어느새 흥분해버린 아들놈이 느껴진다. 화장실에 가려고 몸을 일으키려는데 도진의 허리에 깔린 왼손이 빼지지 않는다. 젠장..... 도진이 녀석이 깨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손을 빼내려는데 갑자기 녀석이 몸을 뒤척여서 흥분해 버린 내 것에 도진의 허벅지가 닿는다. 생각 같아선 녀석의 부드러운 허벅지에 당장 비비고 싶었지만 그래도 이성이라는 게 있는지라 깔려있는 왼손을 빼내려고 다시 힘을 주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아까의 뒤척임에 내 왼손은 더 깊숙이 깔려버린 듯 꿈쩍도 하지 않는다. 미치겠네..... 한참을 낑낑거리다 포기하고 할 수 없이 한손은 녀석의 허리에 깔린 채로 오른손으로 천천히 내 것을 쓰다듬었다. 아무리 친한 친구 놈이라 해도 역시 이런 모습을 들키는 건 무지 쪽팔리기 때문에 소리를 죽인 채 잔뜩 성나 있는 내 것을 풀어주기 시작했다. "아침부터 건강하네..." 흠칫.. 옆으로 돌아보자 도진이 녀석이 묘한 눈을 하고 쳐다보고 있다. 씨발, 언제부터 본거야......열라 쪽팔린다. "내가 좀 도와줄까?" 뭐? 녀석의 말을 채 이해하기도 전에 도진이의 긴 손가락이 내 것을 감아 온다. "흣..." 생각도 못한 자극에 몸이 뒤로 젖혀진다. 뿌리 끝으로부터 훑어 올리는 녀석의 손가락에 척추 끝으로부터 찌릿찌릿한 것이 올라온다. 참을 수 없는 감각에 시트를 세게 쥐면서 나도 모르게 허리를 튕긴다. "야....그...만....." 목소리를 쥐어짜며 말했지만 도진은 더욱더 내 페니스를 세게 움켜쥔다. 강한 자극이 주는 미칠 듯한 쾌감에 낮은 신음을 흘리며 허리를 들썩거리다 결국 녀석의 손에 사정해 버렸다. 친구 손에 완전히 가버린 내 자신이 혼란스러워 진다. 눈을 들자 도발적인 느낌이 드는 적갈색의 눈동자와 마주쳤다. 손에 남겨진 정액을 휴지로 닦아내며 아무렇지도 않은 듯 도진이 말한다. "혼자 하는 것 보단 낫지 않냐?" "..............." 태연한 녀석과는 반대로 얼굴에 피가 몰린다. 자위하다 누나에게 들켰을 때보다 훨씬 더 쪽팔린다. 녀석처럼 태연한 표정을 지을 자신이 없었기 때문에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데 트렁크 위로 우뚝 솟아 있는 도진이의 것이 보인다. 내 눈과 마주친 도진은 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더니 천천히 욕실로 들어갔다. 그래.....이런 건 자연스러운 거야...부끄럽게 여길 일이 아니라구.... 녀석과 나는 혈기 왕성한 고등학생이고 아침에 흥분하는 건 당연한거다. 쏴아~ 애써 혼자서 납득하고 있는데 욕실에서 들려오는 샤워기의 물소리가 자극이 되어 정리되어가던 내 머릿속을 다시 휘젓기 시작한다. 물줄기 아래에서 신음하며 혼자서 자위하고 있을 도진의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리면서 단단해져 오는 내 것이 느껴진다. 결국 난 욕실 안에 있는 녀석을 상상하며 다시 한번 절정에 달했다. 사정과 함께 찾아오는 허탈감과 나른함...... 아무리 아침의 연례행사라고 하지만 난 친구 놈을 상대로 변명의 여지없이 정말 완벽하게 가버렸다. 욕정이 해소되자 잠들어 있던 이성이 깨어나며 내 속의 죄책감을 마구 찔러댄다. 쟈스민 티 <10> 뜨거운 열에 꽃을 피우는..... 같이 걸으면서도 서로 말이 없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도진이 녀석은 평소와 같은데 나 혼자 괜히 어색해져서 말을 안하고 있는 것 뿐이다. 별말하지 않아도 같이 있으면 언제나 편안했는데 지금은 감정적으로 너무나 불편하다. 결국 학교에 도착할 때 까지 나는 안절부절하며 아무 말도 못했고 도진이는 언제나의 무표정한 얼굴로 간단한 인사를 건네고는 자신의 교실로 사라진다. 넌 왜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냐? 괜히 나만 이상한 놈 된 것 같잖아. 교실로 사라지는 녀석의 뒷모습이 약간 원망스럽다. 아침에 느꼈던 쾌락이 하루 종일 머릿속에서 재현되다 지워진다. 더욱 심각한 것은 재현될 때마다 그 강도가 더해져서 이제는 완전히 잘 찍혀진 포르노 비디오 한편이 눈앞에 아른거린다는 것이다. "이지후. 무슨 일 있냐?" 성재가 호기심이 가득한 눈으로 물어온다. "....별.....로........" "그럼 인상 좀 펴라. 너 때문에 반 분위기가 이게 뭐냐?" 주위를 둘러보자 쉬는 시간인데도 쥐죽은 듯 조용하다. "그냥 있어도 얼음장 같이 차가워 보이는 놈이 인상까지 쓰고 있으니까 아주 가관이다." "...................." "고민 있으면 그냥 이 형님한테 툭 털어놔봐라....뭐냐?" 남에게 말하기엔 상당히 껄끄러운 일이지만 그래도 이 단순한 녀석이라면 복잡한 내 머릿속을 정리해 줄지도... 그렇게 생각하자마자 나는 성재를 끌고 옥상으로 올라갔다. 얘기하는 내내 성재는 담배를 꼬나물고는 피식거린다. "야. 이지후. 넌 뭐 그런 것 가지고 고민 하냐?" "참 나...난 또 뭐라구....." 녀석의 너무나 가벼운 반응이 조금 당황스럽다. "너 내가 이상하다고 생각 안하냐?" ".............." 성재는 무슨 말도 안되는 소리를 하느냐는 눈으로 쳐다보더니 피식거리며 말을 잇는다. "이상하긴 뭐가 이상하냐?" "자기손 보다 남의 손에 흥분하는 건 당연한 거고........." "또 상대가 이도진 같이 죽이게 섹시한 놈이라면.........안 가버리는 게 비정상 아니냐?" 도진이라고는 말 안했는데..... "그렇게 눈 크게 뜨지 마라. 임마...." "네 놈이 같은 침대에 잘만큼 친한 놈이 이도진하고 나밖에 더있냐?" 그런가..... "쯧. 앞으론 네 얼굴에 좀 어울리는 고민을 해라.....이도진......" 그렇게 말하고는 성재는 담배를 비벼 끄더니 손으로 내 볼을 툭툭 두드린다. "귀여운 자식......나먼저 내려간다." 꼴통이지만 이런 때만은 이상하게도 머리가 잘 굴러가는 신기한 놈....... 역시 성재에게 의논한 건 잘한 일 인 것 같다. 기분이 훨씬 가벼워짐을 느끼며 옥상에서 내려왔다. 다음 시간은 체육.....따라서 나는 이도진에게 체육복을 빌리러 가야 한다. 성재 덕분에 어느 정도 기분이 가벼워지긴 했지만 직접 얼굴을 마주치려니 역시 망설여지는군...녀석과 만났을 때 머릿속의 포르노 비디오가 재생되어서 흥분해 버릴 가능성도 있고......한참을 어떻게 할까 고민하고 있는데 주경민이 다가와서 체육복을 내밀었다. "저기.....괜찮으면 이거 입을래?" 알짱거리지 말라고 했더니,,,,,,이녀석 정말 머리가 나쁜가? "네 치수에 맞을 꺼야......" ".................." 왜 이녀석이 이렇게 큰 체육복을 가지고 있는거지? 평소 같았으면 무시해 버렸겠지만 아직 도진을 만나기에는 껄끄러웠기 때문에 말없이 녀석이 내민 체육복을 받아 들었다. 내가 받을 줄 몰랐는지 경민은 상당히 놀란 표정을 하더니 곧 얼굴이 새빨개진다. "....고마워....." 주경민은 내게 들릴 듯 말듯이 조그맣게 말하고는 후다닥 자리로 돌아간다. 뭐야...고마워해야 할 쪽은 내가 아닌가? 내키진 않았지만 경민이 건내 준 체육복을 몸에 걸치자 엷은 쟈스민 향 대신 청량한 세제 냄새가 난다. 역시 보통 이런 냄새가 나는 게 정상이지......그 놈이 이상한 거야......아무리 차향이라고는 하지만 사내 녀석이 꽃 냄새가 다 뭐냐. 그렇게 혼자 중얼거리면서 녀석을 피하는 내 자신을 납득시키려 했다. 도진이 녀석 혹시 지금 날 기다리고 있는 건 아닐까? 그러고 보니 오늘 아침에 종이가방을 들고 있었던 것 같은데........ 녀석을 피해버리자 오히려 더욱더 신경이 쓰인다. 2년 동안 쭉 녀석의 체육복을 입어서 그런지 경민에게 받은 체육복은 치수가 맞음에 불구하고 왠지 불편하고 어색한 느낌이 든다. 그러고 보니 나 2년 만에 처음으로 도진이 것이 아닌 타인의 체육복을 입었구나..... 쟈스민 티 <11> 뜨거운 열에 꽃을 피우는..... 주위가 빙글빙글 돌자 머릿속도 같이 빙글빙글 돈다. 성재 녀석은 모르는 여자와 찐하게 키스하고 있고 내 옆에 앉은 여자애는 쉴 새 없이 입을 움직인다. 내 귀에 그 소리는 들리지만 이상하게도 그 의미를 이해할 수는 없다. "야. 이지후. 너 벌써 취했냐?" 그런 것 같기도......성재에 말에 대답하려는데 누군가 내 손을 잡아 일으켜 세운다. 나 그냥 나두면 안되냐? 안 그래도 어지러워 죽겠는데... "우리 춤추자." 예쁘장한 여자애가 웃으면서 내 손을 잡아 어딘 가로 끌고 가자 주위가 번쩍번쩍 거리며 알록달록, 뱅글뱅글 돌아가는 것이 정신을 쏙 빼놓는다. 화려한 조명에 멍해져 있는데 갑자기 그 여자가 목을 감아온다. 밀착된 몸에서 나는 진한 향수 냄새에 기분이 나빠져서 목에 감은 손을 쳐내 버리자 여자는 나에게 눈을 홀기며 뭐라고 떠들더니 어디론가 가버린다. 술 취한 사람 억지로 끌고 나와선 싸가지 없게 혼자 가버리다니....... 술기운에 나른하게 몸이 흔들린다. 아무것도 들리지 않지만 정체를 알 수 없는 무언가가 나를 밑이 보이지 않는 깊은 심연 속으로 끌어들인다. 한참을 그렇게 혼자서 아무렇게나 몸을 흔들고 있는데 희미하게 도진의 모습이 보이는 듯 하다. 이제는 환상까지 보이나? 뭐...환상이든 뭐든 좋아....... 확실히 네 놈이 보고 싶었거든......이도진.... 내 쪽으로 걸어오는 녀석을 바라보며 웃음 짓자 도진은 갑자기 걸음을 멈춘다. 멈추지 마라..........이리와..... 잠시 걸음을 멈췄던 녀석은 다시 내 쪽으로 다가온다. 그 눈동자가 평소와 달리 읽을 수 없는 감정으로 가득 차 있어 왠지 모르게 가슴이 설레 인다. 이런 기분 전에도 한번 느꼈었는데..... 가까이 다가온 녀석의 셔츠 깃을 잡으며 가까이 끌어당기자 녀석은 내 손목을 강하게 잡으며 화난 듯한 눈동자로 나를 응시한다. 그렇게 화내지 마라.......도진아. 내 손목을 잡은 강한 힘을 그대로 끌어당겨서 하얀 목에 얼굴을 묻자 은은한 쟈스민 향이 내 머릿속에 떠다니는 술의 파편들을 자극하면서 황홀한 환상을 보여준다. 이대로 이 향기에 취해버려 다시는 깨어 날 수 없다고 해도....... 그것만으로 좋을 만큼 아찔한 느낌..... "오늘.....미안....." "................." 고개를 들고 정면을 바라보자 녀석의 새빨간 입술과 적갈색 눈동자가 내 시선을 빨아들인다. 최면에 걸린 듯 나도 모르게 촉촉해 보이는 빨간 입술을 핥다가 살짝 벌어진 입술 안으로 혀를 밀어 넣자 그 안에서 살아 움직이는 부드럽고 따뜻한 것이 내 혀를 감아온다. 내 혀가 움직임에 따라 녀석의 혀도 농염하게 따라 움직이며 내 몸속에 잠들어 있던 뜨거운 불꽃을 일으킨다. 열이 전신으로 서서히 퍼져가는 것을 느끼며 정신없이 그 황홀한 감각 속으로 빠져들었다. 열락의 시간이 끝나 서로의 입술이 떨어지자 은색의 실이 가늘게 우리를 이어준다. 환상치고는 너무나 리얼한 느낌에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졌다. 이게 정말 술기운이 보여주는 환상인가? 눈앞에 보이는 도진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는데 갑자기 목뒤에 통증을 느껴지면서 머릿속이 아득해졌다. "주위에 무심한 놈인지 알고는 있었지만......." "이런데서 그런 찐한 키스까지 할 줄은 몰랐다." 클럽 안에 있는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수군거리며 우리 쪽을 쳐다보고 있다. "지후 녀석은 내가 잘 돌본다고 말했던 것 같은데....." ".............." 이죽거리는 유성재 놈의 얼굴을 갈겨주고 싶다. 이 새끼는 예전부터 항상 거슬렸었다. "지후 놈 입술맛 죽이지......" "......비.켜." 더 있다간 녀석을 죽여 버릴 것 같았기에 쓰러진 지후를 업고 입구 쪽으로 걷고 있는데 등 뒤로 웃음기 섞인 유승재의 목소리가 들린다. "첫키스인데 안됐구나. 이도진.....그 녀석 내일이면 하나도 기억도 못 할거다....." 쟈스민 티 <12> 뜨거운 열에 꽃을 피우는..... 머리가 깨질 듯이 아프고 목도 깔깔하다. 푸른색의 천장.....도진이 집이군....... 내가 왜 여기 있지? 어제 하루 종일 도진이 놈 피해 다니다가 기분이 너무 찝찝해서 성재 녀석이랑 술 마시러 간 것 까지는 기억나는데 그 이후로는 도무지 기억이 안 난다. 어제의 일을 기억해 내려고 머리를 굴리고 있는데 녀석이 방으로 들어왔다. "마셔...." 시원해 보이는 꿀물..... 황금빛의 액체를 벌컥벌컥 들이키자 달콤하고 시원한 것이 내 목을 촉촉이 적셔준다. "씻고 밥 먹어라...." 도진이 녀석은 무뚝뚝하게 한마디 툭 내뱉고는 방에서 나가버린다. 이상하게도 막상 도진이의 얼굴을 보자 의외로 아무렇지도 않은 것이.........어제 뭔 일 있었나? 왜 이렇게 자연스럽지? 키친으로 들어가자 식탁에는 금방 한 듯한 밥과 함께 시원하게 보이는 콩나물국이 놓여져 있다. 나는 녀석이 불편해서 어제 하루 종일 피하기만 했는데.... 술에 떡이 된 나를 데려와서 재워주고 꿀물 타주고 콩나물국도 끓여주다니....진짜 감동이다. 밥을 먹으면서 힐끔거리며 도진의 표정을 살피는데 녀석은 언제나와 같은 무표정만 보여준다. "어제 내가 너한테 전화했었냐?" 궁금함과 답답함을 참지 못해 결국 물어버렸다. "......아니......" "................" 그 다음 대답을 한참동안 기다렸지만 녀석은 아무말없이 무표정하게 밥만 먹고 있다. 더 이상은 묻지 말라는 건가? "어제는 미안했다." 꼭 말해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사과했건만 아무런 반응이 없다. 혹시 사과 방식이 맘에 안드는 건가? 아님 생각보다 화가 많이 난건가? "그...말은 어제 들었다." "그랬냐?" "미안....기억이 전혀 안나서....." 어색하게 웃으며 얼버무리자 또다시 식탁에 침묵이 흐른다. 무표정이긴 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살벌한 분위기를 풍기는게.......이녀석 엄청 삐져 있는게 분명하다. 대체 어제 나 뭘 한거야? 기억하지 못하는 내 머리가 정말 원망스럽다. "....지후 오빠 잘잤어?" "어...." 주연이가 나타나자 무거웠던 식탁 분위기가 한결 가벼워진다. "근데....오빠 어제 되게 취했더라...." "우리 오빠한테 업혀 들어온 거 기억나?" "....아니....." 도진이한테 업혀 들어오다니......쪽팔리게 시리....맥주 몇 잔에 완전 뻗었단 말이군...... 누나에게 전화를 걸어서 어제의 외박에 대해 대충 설명하고 나서 학교에 가려는데 교복이 없다. 그러고 보니 어제 나 사복차림이었지.....다시 집으로 가야 되나? "이거 입어라." 도진이 녀석이 교복을 내민다. "너는?" "한 벌 더 있어..." "그래......고맙다." 셔츠를 입고 단추를 잠그자 희미한 쟈스민 향이 올라와서 코를 자극한다. 오늘은 하루 종일 이 냄새를 맡을 수 있겠군.....행복하다. ^0^ 이게 아닌데....아무리 해도 넥타이 모양이 삐뚤하다...이상하네... 한참을 넥타이를 가지고 꼼지락거리고 있는데 도진이가 다가와서 넥타이를 받아들더니 내 셔츠의 단추를 전부 풀기 시작한다. "너 단추가 이게 뭐냐....처음부터 잘못 잠궜잖아..." 도진이는 차례차례 맨 아래쪽까지 단추를 모두 풀더니 하나하나 다시 잠그기 시작한다. 입가에 약간 웃음기를 띄운 채 고개를 숙이고 단추를 잠그는 녀석을 보자 뭔가 묘한 기분이 든다. 이거 또 위험할지도..... 약간 위험한 느낌이 들기는 하지만 넥타이를 매주는 녀석의 손길이 너무 기분 좋아서 그대로 내버려뒀다. 이렇게 있으니까 관찰도 가능하고..... "도진아...너 속눈썹 엄청 길다." 내 말과 동시에 내려 깐 긴 속눈썹이 위로 올라가면서 녀석의 눈동자를 감싼다. 닫혀있던 꽃봉오리가 천천히 피는 것 같은 느낌......되게 예쁘다. "만져 봐도 되냐?" "................." 도진의 침묵을 긍정으로 해석하곤 천천히 손가락을 대자 녀석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린다. 되게 신기하네......조심스럽게 만져보니 굉장히 부드럽다. "몰랐는데 속눈썹도 머리카락 색이랑 같구나..." "................." "네 속눈썹, 적갈색이야......오늘 처음 알았다." 내말에 도진이 녀석은 멍한 표정을 한다. 혹시 녀석도 오늘 처음 알았나? 학교 가는 길이 어제와 달리 무지 가볍다. 역시 하루의 시작은 기분 좋게 해야지.... 어제와 마찬가지로 도진은 무표정한 얼굴로 별 말없이 걷고만 있고 나 역시 그 옆에서 아무말없이 보조를 맞추고 있지만 너무나 편안하고 느긋한 기분이 든다. "오늘도 무지하게 더울 것 같군." 옆을 쳐다보자 멍하니 하늘을 쳐다보는 도진의 속눈썹이 하늘을 향해 예쁘게 말려 올라가 있는 것이.....만지고 싶은 욕구를 자극한다......또 만지면 화낼까? 도진의 옆모습을 훔쳐보며 갈등을 때리고 있는데, 갑자기 녀석이 쳐다봐서 나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 버렸다. 어제 무슨일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뭐...이젠 기억 안나도 상관없다. 무슨 일이 있어도 도진은 지금처럼 내 옆에 있어줄 거니까..... 쟈스민 티 <13> 뜨거운 열에 꽃을 피우는..... "왔냐?" 성재는 거칠게 가방을 책상 위에 놓고는 나를 노려본다. "뭐..왔냐? 너는 그 말이 입술을 비집고 나오냐?" "무슨..." "새꺄....너 어제 뻗어서 술 값 안내고 갔잖아." "도진이 새끼, 뒤처리를 하려면 확실히 하고 갈 것이지...." "덕분에 술값 내 월급에서 제했다........" "..........." "12만원 나왔지만 딱 반 잘라서 5만원만 내놔라." 날강도 같은 놈....난 몇 잔 마시지도 않았구만..... "돈 없다. 배째...." 말이 떨어지기도 전에 성재 녀석이 거칠게 멱살을 잡아온다. "돈 없으면 몸으로 때워. 새꺄.....오늘부터 삼일 동안 내 대신 알바해라." 별로 내키진 않았지만 어쩔 수 없이 여기까지 왔다. 결국은 녀석이 해달라는 대로 하고 있는 내 자신을 볼 때면 어릴때부터 난 성재놈한테 상당히 약한 것 같다. 하긴 그 녀석에게 휘둘리지 않는 놈이 어디 있겠냐만은.....문을 열고 들어가자 아직 오픈 전이라 그런지 가게가 한산하다. "저기..." 테이블에 앉아서 열심히 포크를 닦고 있는 녀석에게 말을 걸자 그 녀석은 내 얼굴을 보며 노골적으로 움찔거린다. 왜 저러지? 녀석의 행동에 심히 의문을 느끼면서 나는 용건을 말했다. "성재 대신 아르바이트하러 왔는데..." 녀석은 한동안 내 얼굴을 뚫어지듯 쳐다보더니 다시 움찔거린다. 뭐야.....이 놈.......슬슬 기분이 나빠져 온다. "아...그래.....그럼 날 따라와." 락카실로 보이는 곳에 도착하자 그 녀석은 나에게 유니폼 같은 걸 건내주고 멀뚱하게 서있다. 갈아입으란 말인가..... "저기.....난 김동화라고 해........너는?" "이지후." 나보다 나이가 많은 것 같지만 이미 반말해버린 거.... 동화라는 사람은 내가 반말을 쓰는데도 전혀 개의치 않는 것 같다. 챠이나식 하얀 셔츠를 입고 검은 색의 바지를 입자 까만 랩 스커트를 내민다. 뭐야......이런 걸 입고 어떻게 일해? 나도 모르게 인상이 찌푸려진다. "내 얼굴에 뭐 묻었어?" 빤히 쳐다보는 시선이 너무나 신경쓰여서 묻자 동화는 갑자기 얼굴을 붉히고는 더듬더듬 변명해댄다. "아니....그게 아니라......" "저기.....성재랑은 많이 친해?" ".......뭐....친하다고 할 수 있지......왜?" "아...아무것도 아냐...." 그렇게 말하고는 녀석은 밖으로 나가버린다. 성재 녀석, 혹시 저 사람한테까지 해코지한 거 아냐? 내가 이래서 저 자식 대타 뛰는 거 싫다니깐. 가는데 마다 사람을 흉악범 보듯 보다니..... 주문받고 맥주와 안주를 나르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 아직 익숙해지지도 않았는데 갑자기 이렇게 물밀 듯이 밀려오다니.....그나저나 이 놈에 가게는 왜 알바 생을 다섯 명밖에 안 쓰는 거야? 이거 노동 착취 아닌가? 몸이 피곤해지니 괜히 짜증이 난다. "주문하시겠습니까? "오늘 언제 끝나요?" 섹시하게 생긴 누님이 몸을 앞으로 기울이자 파진 옷 사이로 가슴계곡이 보인다. C컵은 되겠군......보지 않으려 해도 내 눈은 계속 부자연스럽게 출렁거리는 여자의 가슴 쪽을 향한다. 모양을 보아하니 실리콘 넣었군..... "12시에 끝나는데요....주문은 뭘 로 하시겠습니까?" "아무거나 제일 비싼 거로 할께요,,," "그러시든지...." 주문을 받고 돌아서는데 그 누님이 내 소매를 잡는다. "마치고 나랑 데이트 안할래?" 갑자기 왠 반말? 그리고 난 실리콘 가슴에는 관심 없어.... "죄송하지만 저 애인 있습니다." 얼어붙을 정도로 쌀쌀맞게 말하자 많이 무안했는지 섹시한 누님의 얼굴이 빨개진다. 일하다 쌓인 짜증을 섹시 누님에게 풀어버린 것 같아서 좀 미안해진다. 내 표정이 생각 외로 차가웠는지 그 누님은 바로 계산을 하고 가게에서 나가버렸다. 미안하긴 하지만......손님 하나 줄었다. ^0^ 일을 끝내고 피곤에 쩔은 몸을 끌고 밖으로 나오자 성재 녀석이 담배를 피며 바이크에 삐딱하게 걸터 앉아있다. 내가 네 놈 대신 일하는 동안 넌 아주 즐거웠나 보다? "야.....수고했다......오늘 내 대신 일 잘했냐?" "피곤해 죽겠다." 성재가 담배에 불을 붙여서 건내준다. "근데 너 동화씨한테 뭔 짓 했냐?" "......동화가 누구냐?" "........눈 동그랗고 순진하게 생긴 사람........같이 일하면서 이름도 모르냐?" "아...그 놈......난 아무짓도 안했는데...." "그럼 왜 날 보면서 움찔 거리냐? 네 놈이 괴롭혀서 그런 거 아냐?" "그놈이 널 보면서 움찔거렸냐? " "............." ".....그건 나 때문이 아니라 아마 너 때문일 걸?" "무슨 말이야?' "너 어제일 하나도 기억 안나지?" "??" "하긴....기억나면 거기서 일 못하지....." "???" "둔한 놈.....타라 데려다 줄께...." 확실하게 대답해주지 않는 성재의 태도에 의아함을 느끼며 뒤에 타자 녀석은 빠르게 바이크를 몰기 시작한다. 어제 뭔가 있긴 있었군........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고 싶은 기분과 알아선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동시에 든다. 마치 열어서는 안되는 판도라의 상자를 앞에 두고 갈등하고 있는 것처럼...... 뺨을 때리고 지나가는 밤바람이 차다 쟈스민 티 <14> 뜨거운 열에 꽃을 피우는..... 뭔가 아주 안 풀리는 날이라는 게 누구에게나 있다. 불행하게도 나에겐 오늘이 그런 것 같다. 고작 3분 지각해서 이 더운 날 운동장 10바퀴나 돌고 , 국어 숙제 안 해서 히스테리 노처녀에게 열라 깨지고 라이터 꺼내려다 500원 짜리를 하수구에 빠뜨리고...... 계속되는 악재에 지쳐버려서 일부러 야자도 빠지고 집으로 터덜터덜 돌아오는 데 아파트 현관 입구에서 누군가와 부딪혔다. 나는 아무렇지도 않았지만 부딪힌 쪽은 꽤나 충격이 컸는지 땅바닥에 주저앉아 있다. 끝까지 되는 일이 없군...... 잘못 넘어져서 입원이라도 하는거아냐? 일으켜주려고 손을 내밀자 왠지 낯익은 얼굴이 나를 올려다본다. 우아한 느낌이 드는 아름다운 중년 여성은 부드럽게 웃으면서 내 손을 잡고 일어서며 말했다. "오랜만이구나...지후야....." "..............." "지금 시간 괜찮니? 너랑 얘기를 좀 하고 싶은데...." "................." "오랜만이잖니..........설마 너마저 나를 외면 할거니?" 따뜻함이 담긴 눈동자가 나를 바라보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달콤하게 속삭인다. "누나.....만나셨어요?" 내 물음에 그녀는 당황스러운 듯 고개를 돌려 시선을 피한다. 만난거군..... 누나가 너무나 걱정됐기 때문에 그녀를 지나쳐 엘리베이터 앞으로 걸어갔다. 버튼을 눌렀지만 엘리베이터는 20층에서 멈춘 채 내려올 생각을 하지 않는다. 정말 오늘은 끝내주는 날이군...... "저기....지후야.....많이 화난거 알아...그렇지만 내 말도 좀 들어주렴...." "화나지 않았습니다.........얘기는 나중에 듣도록 할께요..." 엘리베이터가 천천히 내려오기 시작한다. 이 사람이과 만났을 누나가 너무 걱정된다. ".......아냐.....너도 지연이처럼 날 미워하는 거지?" 엘리베이터를 타면서 쳐다본 그녀는 굉장히 필사적인 눈동자를 하고 있었다. "......다음에 만나도록 하지요,,,," "지금은 당신과 만났을 누나가 너무 걱정되네요......" "조심해서 돌아가세요...어머니...." 안타까운 표정을 한 여자의 모습을 남겨두고 엘리베이터의 문이 서서히 닫힌다. 이제 와서 왜 그런 표정을 하는 건데? 위선자...... "누나!" 문을 열자 집안이 엉망진창이다. 날아간 전화기......바닥을 구르고 있는 쿠션들.....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물건들..... 그 속에 누나가 고개를 묻고 웅크리고 있었다. "누나, 괜찮아?" "어.....지후 왔니? " "놀랬지? 미안.......너무 화가 나서 이거저거 생각 없이 던져버렸어..." 눈물자국은 보이지 앉지만 멍한 눈을 하고 나를 바라본다. "어디 다친 덴 없어?" "괜찮아.....그 여자가 왔길래......너무 화가 나서......." "우리 둘이 잘 살고 있는데....이제 와서 뭘 어쩌겠다고.....한심한 여자...." "전부 그 여자한테 던졌는데 이상하게 다 빗나가더라....." "병신같이........나도 참.....웃긴다 그치?" 많이 놀라고 화나고 분했을 텐데.........누나는 내 앞에서 절대 울지 않는다. 아니 울 수 없는 거겠지...... 내가 걱정 할까봐..... 내가 상처 받을 까봐...... 그리고 내가 같이 울어 버릴까봐.... 한번 울어버리면 누나도 나도 절대 눈물을 그칠 수 없을 테니까..... 저렇게 억지로 숨죽여 참는 것이겠지..... "내가 치울 테니까 들어가 있어.....누나 아직 밥 안 먹었지?" "그래....아직 안 먹었다......왜 네가 밥하려고?" "아서라......김치도 못 써는 녀석이....." 누나는 피식 웃으면서 거실에 흐트러저 있던 물건을 정리하기 시작한다. 상처받아 공허한 눈을 하던 누나는 다시 언제나의 강하고 도도한 모습으로 돌아온다. 생각해 보면 나도 누나도 그 날 이후 울어본 적이 없다. 슬플 때 누나는 밝은척하며 씩씩하게 앞으로 나아갔고 나는 슬픔을 누나에게 보이지 않기 위해 표정을 지웠다. 외로움 속에서 나름대로 터득한 자기 방어 법이었지만 지금은 그것이 우리의 일부가 되어 서로에게 서글픔을 느끼게 한다. 당신은 왜 우리 앞에 나타난 겁니까......어머니.... 쟈스민 티 <15> 뜨거운 열에 꽃을 피우는..... 한 모금 빨 때마다 불안 초조했던 마음이 가라앉는 것이 담배는 신기한 진정효과가 있는 것 같다. 공기 속으로 퍼져가는 하얀 연기를 보면 내 마음속의 불안했던 무언가도 함께 날아가 버리는 것 같은 느낌에 후련해진다. 등나무 벤치 아래서 멍하니 담배를 피고 있는데 성재 녀석이 다가와 옆에 털썩 주저앉는다. "어제는 미안했다." "됐어....임마.......대신 이틀 더 해라." 겨우.....알바 하루 빠진 거 가지고......네가 고리대금업자냐? "................" "너 무슨 일 있냐?" 성재가 담배에 불을 붙이면서 무심한 듯이 묻는다. "........어제......어머니.....만났다." "....그러냐......" "............." "7년 만에 만나는데.....아무런 느낌도 안들더라...." "................" "정말 나 웃기지 않냐?" "..............." 한참동안 침묵을 지키던 성재는 피고 있던 장초를 비벼 끄면서 가만히 나를 쳐다본다. 녀석의 눈동자에 분노의 빛이 가득하다. "아무렇지도 않다고...." "그럼 왜 그런 얼굴을 하고 있냐?" 무슨..... "아무렇지도 않다면서....." "왜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을 하냐고.....새끼야...." 내가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이라고.... 그럴리가.......난 아무런 표정도 짓고 있지 않는데......누나를 힘들게 하는 표정 따위 예전에 지워버렸는데......네가 잘못 본 걸꺼야. "정말 네 놈한테 질려버렸다." "기쁘면 웃고 상처받았으면 솔직하게 울란 말이야." "언제까지 그렇게 둔감한척 네 감정에서 눈 돌릴 거냐?" "지독하게 예민한 네 심장이 언제까지 견딜 수 있을 것 같냐?" 진심이 담긴 목소리가 한마디 한마디가 잔잔했던 호수에 파문을 일으킨다. 내가 계속 둔감한 척 내 감정에서 눈돌려왔다고.......아니야.....난 그저 표정을 지웠을 뿐 눈돌리고 외면했던 건 아니었어. "다른 놈들이 왜 널보고 차갑다고 그러는 줄 아냐?" "네 스스로 감정을 차단하는 게 그놈들 눈에도 보이기 때문이다." "알아들었냐. 이 멍청한 새끼야" 그렇게 쉴 새 없이 지껄이곤 성재 녀석은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쓸어 올린다. 이 녀석이 이렇게 까지 화내는 건 처음 본다. 녀석이 던지는 말 하나하나가 혼란함이 되어 가슴속에 무겁게 침전 된다. 성재는 그 자리에 서서 한참을 씩씩거리더니 옆에 있던 빈 깡통을 세게 차버리곤 내 멱살을 잡으면서 말했다. "눈깔 퉁퉁 부을 정도로 울 때까지 내 앞에 얼씬도 하지마라.....이지후........" 녀석이 멱살을 잡은 손을 거칠게 놓고서 내게서 뒤돌아선다. 새끼 멋있는 척 하기는 ........그래도...........고맙다. 전에 만났을 때 그녀가 쥐어준 명함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 내가 정말 둔감한 척 하면서 내 자신을 속여 왔는지 확인해 보고 싶다. 다시 만난 내 어머니는 여전히 아름다웠다. 그녀는 꽤 예쁘고 아기자기한 커피숍을 가지고 있었고 그녀가 마시는 커피에서는 향긋하고 고소한 원두커피향이 났다. "이렇게 만나줘서 고마워......" "난 네가 날 미워하는 줄 알았거든......" 내 표정을 살피면서 그녀는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내 어머니를 보면서 지금 나는 무엇을 느끼고 있지? "너희에게는 정말 미안하게 생각해.......그렇지만 내게도 사정이 있었단다." ".............." "아버지의 보험금만 던져놓고 누나와 나를 버리신 이유 말이지요?" "저도 예전부터 듣고 싶었습니다. 그 사정이라는 것을....." 어머니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다. 왜 저러는 거지? 사실 아닌가? 아님 좀더 그럴듯하게 포장해서 듣기 좋게 말해주길 바랬나? 그녀는 잠깐 침묵을 치키더니 약간 떨리는 어조로 말하기 시작했다. "그래....맞아......하지만.....나도 그러고 싶어서 그런게 아냐....." "엄마는....아무 능력도 없었고....." "세상은 여자 혼자 아이 키우고 살만큼 그렇게 만만한 곳이 아니었어...." "나도 많이 힘들었다....." 그래서요.. "이제 와서 이런 말 하는 건 염치없지만, 난 정말 너희를 사랑했다. 지금도 사랑해." 당신의 사랑은 그런 것입니까? "정말이야...." "그래서..언제나 너희들이 너무 보고 싶었고,,,,," "너희들한테 미움 받는 게 너무 가슴 아팠어....." "지후야....내가 싫고 밉더라도 이렇게 가끔씩 만나줄 수 없겠니? 난 그래도 네 엄마잖니..." 당신은 정말 끝까지 지독하게 이기적이네요. "우리를 사랑했다면..... 당신은 그때 우리에게서 도망치치 말았어야 했어요...." "하나를 얻으면 하나를 잃어야지요." "내게......가족은 누나 밖에 없어요....어머니." 일어서려는 나를 그녀가 붙잡아 온다. 하얗고 고운 손에서 느껴지는 따뜻한 온기가 나를 강하게 얽어맨다. "딸랑" 그 순간 카페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면서 한 사람의 인영이 나타났다. 왠지 모르게 드는 기분 나쁜 예감.....나쁜 예감은 언제나 맞아 떨어진다. "경민아...." 내 팔을 잡은 그녀의 손이 미미하게 떨리더니 재빨리 나에게서 떨어져간다. 그녀는 굉장히 당황했는지 보기가 안스러울 정도로 허둥거리면서 변명거릴 찾기 시작했다. 씁쓸하군..... 이렇게 얽힐 줄은 몰랐는데......주경민...... 이상하게 내 앞에 알짱거린다고 생각했지만 너무 짜증나는 연출 아니냐? 굳어있는 어머니와 주경민을 뒤로하고 카페에서 나왔다. 무섭도록 심장이 빨리 뛴다. 내가 지금 느끼는 게 뭐지? 왜 이렇게 심장이 빨리 뛰는 거야...... 정말 난 지금까지 내 감정에서 눈 돌리고 있었던 건가? 내 심장이 말하고 있는 것을 전혀 알아들을 수 없다. 아무런 기대 없이 그녀를 만난다고 생각했지만 나는 역시 그녀에게 기대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녀가 나를 아직도 사랑하고 있기를..... 따듯한 팔로 나를 안아주기를....... 그 녀석 앞에서도 내 손을 놓지 않아주길..... 나를 선택해 주기를............................나는 정말 간절히 바랬던 것 같다. 누군가 내 옷을 잡아당겨서 쳐다보니 주경민이 헉헉거리며 나를 쳐다보고 있다. "뭐야?" "아.....저기.......난 네가 거기 있을 줄 몰랐어.......정말이야...." 순간 내 눈앞에 있는 대상에게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꼈다. ".........내가 말했지......." "......한번만 더 내 앞에서 알짱거리면 밟아버리겠다고....." "마지막 경고다. 밟히기 싫으면 내 앞에서 꺼져!" 당장이라도 터질 것 같은 분노를 간신히 억누르며 말하고는 난 정신없이 뛰기 시작했다. 유성재..........네 말이 맞는 것 같다. 난 표정만 지웠던 게 아니었어....이렇게 상처 받는 것이 싫어서 계속 모든 걸 모른 척 해왔던 거다. 이대로 계속 모른 척 살아가면 아프지 않을 줄 알았어. 그런데 어쪄냐........면역이 안 된 내 심장은 정말 찢어져 버릴 것 같이 아프다. 쟈스민 티 <16> 뜨거운 열에 꽃을 피우는..... 정신없이 뛰고 있는데 갑자기 비가 내린다. 세차게 내리는 비를 맞으며 한참을 뛰자 몸속에 들끓던 열이 차츰 식어간다. 이런 기분으로 비까지 홀딱 맞다니....청승맞은 짓은 혼자 다하는군......... 문을 연 도진이 녀석이 약간 놀란 얼굴을 한다. 물에 빠진 생쥐 꼴 일테니 놀랄 만 하겠지..... 물이 뚝뚝 떨어지는 채로 거실로 들어가자 도진이가 커다란 타올을 가져와서 나를 닦아준다. 머리카락까지 섬세하게 닦아주는 녀석의 손길이 감동스럽다. 멍하니 녀석이 하는 대로 내버려 두고 있는데 도진이의 긴 손가락이 계속 내 눈가를 닦고 있어서 왜 그러냐는 식으로 올려다보자 녀석은 알 수 없는 눈동자를 하고 있다. "울지 마라." "............." "............." "......나 지금.....우냐?" "..어....." 그러고 보니 내 무릎에 뭔가 따뜻한 것이 투두툭 떨어진다. 이런 게 눈물인가? 하지만 난 그 이후로 울어본 적이 없는데.....어머니가 내 손을 뿌리치며 모르는 아저씨와 가버린 이후로....내 눈물은 말라버렸는데.....울어도 변하는 건 아무것도 없다는 걸 깨달아 버렸는데 지금 왜 난 눈물을 흘리고 있는 거지? 갑자기 울어서 눈물샘이 고장이 났는지 흘린 기억이 없는 눈물이 끝없이 떨어진다. 움찔 지금 뭐하는 거...... 도진이의 혀가 턱에 맺혀 떨어지는 내 눈물을 핥는다. 놀라서 쳐다본 녀석의 눈동자가 부드럽게 웃음 짓는다. "너무 아까워서 말이야...." 그렇게 중얼거리듯 말하고는 다시 내 눈물을 핥기 시작했다. 까슬까슬하고 따뜻한 혀가 내 뺨 위를 돌아다니며 물기를 닦아낸다. 뭐야.....이도진.......왜 이러는데........ 도진의 행동에 당황스러움을 느꼈지만 자극적이면서도 위로해주는 듯한 그 따뜻한 느낌을 거부할 수 없었다. 도진은 쉴 새 없이 떨어지는 눈물을 핥으면서 내 속눈썹에 키스한다. "......진주 같아..." 허스키하게 잠긴 목소리가 내 욕망과 이성을 동시에 깨운다. 아래에서 뜨거운 욕망이 고개를 들며 나를 속박해오고 내 이성은 이 상황을 부정한다. 이대로 가다간 정말 위험하다. "그만해라. 이도진...." 이대로 계속 있고 싶은 욕망을 간신히 누르며 도진을 밀어내자 녀석은 장난스러운 얼굴을 하고는 조용히 속삭인다. "보고 있자니 갑자기 먹고 싶어져서......." "욕실에 따뜻한 물 받아놨으니까 몸 담궈라." 따뜻한 물에 기분 좋게 몸을 담그니 아까까지 찢어질 정도로 아팠던 심장이 조금 치유되는 듯한 느낌이 든다. 쪽팔리지만 눈물이란 걸 빼고 나니 가슴에서 뭔가가 내려간 느낌이고... 내가 도진이에게 가지는 감정을 알 수 없다. 특별하고 소중한 녀석이지만 왠지 그 이상인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한다. 때로 너무 자극적인 도진의 모습에 흥분해 버리는 내 자신이 당황스럽다. 성재는 별로 신경쓸만한 게 아니라고 했지만...... 샤워를 끝내고 나오자 테이블 위에 꽃잎이 반쯤 벌어진 쟈스민 티가 놓여있다. 완전히 꽃잎이 벌어질 때까지 바라보다 한 모금 마시자 내 몸 안에도 쟈스민 향이 퍼진다. "맛있냐?" "....어...." "마시고 나면 잠이 잘 올거야...수면 효과가 있거든....." 역시..... 도진이는 두 손으로 찻잔을 감싸고 조심스럽게 마시기 시작한다. 찻 속에 떠있는 꽃잎을 바라보는지 눈을 내려 깔고 차를 홀짝거리는 녀석은 이상한 느낌이 들게 한다. "이도진.." "왜?" "너 너무 야한 것 같다." "그러냐?" 도진이 녀석은 대수롭지 않은 듯 흘려듣는다. 뭐야...저 무심한 반응은.... "근데 왜 울었냐?" 갑작스럽게 아픈 곳을 찌르는 질문에 당황해서 순간 할말을 잃었다. ".....뭐...별거 아니야....." "그래? 너는 별거 아닌거에 우는 놈이었군..." 위에서 깔아보며 놀리는 듯한 도진의 어조에 속에서 뭔가 울컥하고 올라온다. "네가 뭘 알아?" "7년전에 누나랑 날 버렸던 엄마를 만났는데 나한테 사랑한다고 말하더니 재혼한 집 자식을 보자마자 다시 냉정하게 밀쳐버리더라.....그래서 상처받았다. 왜?" 이렇게 가벼운 내용이 아닌데.....정말 심장이 찢어지는 것처럼 아팠는데.... 내 심정을 표현하기에는 뭔가 부족하다. 나는 이렇게 표현력이 부족한 놈이었던가? 내 심정을 제대로 표현하기 위해 좀더 적절한 말을 찾고 있는데 도진이가 다가와서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만지기 시작한다. 야....네가 그러면 심란해져서 생각이 안 나잖아.... "고맙다." "뭐가?" "날 선택해줘서....." "내 앞에서 울어줘서....." "솔직하게 말해줘서...." "이도진......뭐 잘못 먹었냐? 닭 털 날린다." 돌변한 녀석의 태도에 의아감과 부담스러움을 느끼며 말하자 또 빙긋이 웃어온다. 너 오늘 나 기분 안 좋다고 서비스해주는 거냐? 왜 이리 방긋 거리냐? "괜찮아 질거다...." 도진이 녀석은 무뚝뚝하게 말하면서 내 머리를 툭툭 친다. 다정한 백 마디 말보다도 무뚝뚝하게 내뱉는 그 한마디가 가슴속을 파고든다. 정말로........정말로 괜찮아 질 것 같은 느낌....... 너 한테 오길 정말 잘한 것 같다. 도진아.. 쟈스민 티 <17> 뜨거운 열에 꽃을 피우는..... 내가 아무리 슬프다 해도 지구는 계속 돌고 사람들의 일상은 변하지 않는다. 도진이 놈을 기다리다 지쳐서 담배에 불을 붙이는데 한쪽 구석에 처박혀 그림을 그리고 있던 놈이 다가온다. 아....미술실에선 금연인가? "저,,,,,지후 선배.........제 모델이 되주세요..." 되게 소심해 보이는데 나한테 부탁을 하다니.....좀 놀랍다. "누드냐" "그...그런거 아니에요.......선배" "...제가 어떻게 감히......." 별거 아닌 말에 녀석은 체리토마토처럼 얼굴이 붉히더니 말을 더듬는다. 되게 순진하네.... 순간 문소리가 나면서 도진이가 들어왔다. "늦었잖아. 이도진." "안녕하세요. 도진 선배" 녀석은 인사하는 녀석을 힐끗 보더니 내 입에 문 담배를 긴 손가락으로 낚아채서 깊게 빨아들인다. 빨간 입술로 깊게 담배를 빨아대는 녀석이 굉장히 섹시하다. 나른한 표정으로 연기를 내뿜고는 다시 내 입에 물여 주는 담배에 녀석의 입술 맛이 남아있는 것 같아 묘하게 자극적이다. 한 두번도 아니고 친구놈한테 이런 기분을 느끼다니......난 정말 변탠가 보다. "아직 남아 있었냐? 문진현." 지독하게 싸늘함이 느껴지는 말투....뭔가 심사가 뒤틀렸군... 도진의 싸늘한 태도에 진현이라는 녀석은 쫄아서 바닥만 쳐다보고 있다. 체리토마토 같이 반응이 꽤 귀여웠는데.....좀 도와줄까? "나 무지 배고프다. 도진아. 빨리 밥이나 먹으로 가자.....응?" 도진이 어깨에 팔을 두르고 나답지 않게 콧소리까지 내며 아양을 떨자 녀석의 눈에서 싸늘한 빛이 서서히 사라진다. 다행이다. 먹히는 군.... 미술실에서 나오려는 데 진현이라는 녀석이 뭔가 호소하는 눈으로 나를 뚫어지게 쳐다본다. 아 그랬지...... "야...너 진현이라고 했지?" "네..."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바라보는 모습이 역시 귀엽다. "제의는 고맙지만 사양한다." "나는 이 녀석 전속이거든......." 멋지게 말하고 난 뒤 도진을 쳐다보자 언제나의 무표정, 무감각이다. 뭐야......이러면 보통 감동먹지 않나? 둔한 놈... 너무나 반응 없는 녀석의 모습에 혼자 오버한 것 같아 쪽팔려서 조금 앞서서 걸었다. 녀석 앞에서 실컷 울어버린 후로 우리의 관계는 약간 달라지기 시작했다. 우리'라고 해봐야 나 혼자 그렇게 느끼는 것이고 도진이 녀석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전혀 모르지만..... 녀석의 손에서 완전히 가버린 그 날부터 이상하게 녀석이 의식되는 것이 요즘은 도진의 사소한 행동에도 곧잘 흥분해버리는 내 자신을 느낀다. 처음에는 많이 당황스러웠지만 그건 성재 말대로 도진이가 너무 섹시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그 날 이후부터 정확히 말하면 도진이가 혀로 내 눈물을 핥은 날부터 나는 도진이랑 섹스 하는 꿈을 빈번하게 꾼다. 친구를 상대로 그런 꿈을 꾸다니....정말 돌아버리겠다. 아무래도 성재에게 다시 상담해 봐야겠군..... 쟈스민 티 <18> 뜨거운 열에 꽃을 피우는..... "내가 그런 걸 어떻게 아냐?" 쪽팔림을 무릅쓰고 얘기했건만 성재 녀석은 유리잔을 닦으며 시큰둥하게 말한다. 네 놈을 믿고 여기까지 왔건만 너무한 것 아니냐? 상당히 불만스러운 눈으로 녀석을 쳐다보자 성재는 피식하고 웃더니 계속 유리잔을 닦으며 말한다. "그러니까 네 놈도 모르는 감정을 내가 어떻게 아냐구..." "내가 신이냐? 아무리 나라도 모르는 게 있다고...." 우쭐거리며 잘난 척하는 꼴이 뭔가를 요구할 때 녀석의 모습이다. "바라는게 뭐냐?"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 성재 녀석은 능글능글 웃으면서 입을 연다. "정말로 알고 싶다면....만원만 내라...." 네놈이 그러면 그렇지.... 지갑에서 만원을 꺼내어 녀석에게 건내주자 성재는 만족스러운 얼굴을 하면서 주머니에 넣으면서 내게 속삭인다. "그렇게나 알고 싶다니....가르쳐 주지...." 녀석은 그렇게 말하고 갑자기 내 목을 끌어당기더니 입을 맞춘다. 갑작스러운 사태에 놀라 벌어진 입술사이로 녀석의 혀가 들어온다. 이게 무슨짓.... 성재 녀석을 밀어내려고 팔에 힘을 주자 성재는 더 강하게 나를 끌어당긴다. 젠장.... 저항하는 걸 포기하고 눈을 감고 녀석의 혀를 받아들였다. 내 입안을 헤집는 따뜻한 녀석의 혀를 쫓아 움직이기 시작하자 성재는 더욱 적극적으로 나를 감아온다. "느낌이 어땠냐?" 나에게서 입술을 뗀 성재 녀석이 물어온다. 대체 뭐하자는 건데.... "뭐 별로 나쁘진 않았어...." "호~그리고?" ".......좀 흥분했던 것 같기도 하고...." "근데 갑자기 이러는 게 어딨냐! 놀랐잖아 새끼야!" "흠~나쁘지는 않다라....그것뿐이냐?" "그래...그것뿐이다. 그 이상 내가 뭘 느껴야 하는데?" 잠시 동안 성재는 읽을 수 없는 묘한 표정을 짓더니 곧 말을 잇는다. "이도진하고도 키스해보고 지금 느낌과 잘 비교해봐라." "그때 네가 느끼는 게 아마 네 진심일 거다." 과연. 머리가 모르면 몸으로 느끼란 말이지? 상당히 단순하고도 확실한 방법이라는 생각이 든다. 성재의 제안에 나름대로 설득력을 느끼고 있는데 뭔가 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리자 동화씨가 맥주병을 바닥에 떨어뜨린 채 굳어져서 우리를 바라보고 있다. 봐버렸군,,... 성재는 동화씨를 힐끗 한번 쳐다보더니 아무 일 없다는 듯 뻔뻔한 얼굴로 다시 유리잔을 닦기 시작한다. 하여간 얼굴 두꺼운 놈....난 쪽팔려 죽겠다. 굳어서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서있는 동화씨가 걱정 되서 다가가자 그 사람은 얼굴이 빨개지면서 크게 움찔대더니 어딘가로 다다닥 뛰어간다. 병균도 아닌데 그렇게까지 피해야 되나...... "야...동화씨. 되게 충격먹은 모양이다......." "알게 뭐냐.....하여간 이래서 소심한 새끼들이 싫다니깐..." 성재는 투덜거리듯 말하더니 닦아 놓은 유리잔을 진열대위에 차례로 넣기 시작한다. "그만 가볼께.....수고해라...." "오냐.....앞으로도 자주 애용 바란다." 이죽거리는 성재 녀석에게 웃어주며 가게에서 나왔다. 이상하게도 옛날부터 저놈한테는 기대기만 하는 것 같다. 언제나 내 뒤에서 나를 지켜봐주는 녀석..... 그래서 네 녀석 입술이 조금은 기분 좋았는지도 모르겠다. 쟈스민 티 <19> 뜨거운 열에 꽃을 피우는..... 얼굴이 따갑다. 차라리 노골적으로 쳐다보면 신경이 덜 쓰이겠는데 내 눈치를 보며 힐끔거리는 게 상당히 신경 거슬린다. 그렇게 이상한가? 나름대로 고민해서 결정한 건데..... 반 놈들의 힐끔거리는 시선을 더 이상 참을 수 없어서 교실을 나와 버렸다. 터벅터벅 복도를 걸어가는데....젠장 어딜 가나 똑같군.....그만 좀 힐끔거려라..... 지긋지긋하게 따라다니는 시선에 한숨을 쉬며 땅만 쳐다보면서 가고 있는데 누군가가 내 앞에 서서 움직이지 않는다. 누구지? 고개를 들어서 보자 성재 녀석이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다. "이지후....너 그게 뭐냐?" "튀김 먹다 왔냐? 입술이 왜 그렇게 번들거리냐?" "좀 터서....." "호오~이 습기 많고 더운 날 입술이 트다니...네 입술은 상당히 특이한 체질인가 보다..." "안 그러냐?" 저렇게 까지 빈정거리다니.....성격 나쁜 새끼... 다 알고 있다는 듯이 빈정거리는 녀석의 말투에 얼굴이 화끈거린다. "크크큭" "생긴 건 쿨한 놈이 왜 이렇게 귀여운 짓만 골라서 하냐?" "시끄러..." 물 만난 고기 마냥 한참을 비웃어대던 성재는 내 입술을 만지며 말한다. "이지후.....이런거 안 발라도 네 입술 충분히 매력적이다......먹고 싶다구...." "뭐, 이걸로 확실히...녀석을 자극할 수는 있겠지만......지나치면 화가 될 수도 있다." "과유불급이라는 말이 그냥 나온 게 아니거든...." 어울리지 않게 한자성어를 다 쓰다니..... 그나저나 역시 지워야 하나? 섹시해 보이려고 일부러 빨간빛이 나는 걸 발랐는데...색깔은 별로 안나고 번들거리기만 한다. 누나가 발랐을 땐 반짝반짝한 게 되게 예뻐 보였는데..... 도진이 내 입술을 빤히 쳐다본다. 역시 지울 걸 그랬나? 하지만 네 놈과 키스하려면 어쩔 수 없잖아... 남자 입술 보고 키스하고 싶다고 생각하는 놈은 없으니까..... '찰싹' 뭔가 내 입술에 달라붙는다. 뭐야 이건.....종이? 연습장으로 보이는 것이 내 입술을 짓누르다 떨어진다. 도진이는 연습장에 찍힌 입술 프린트를 한번 쳐다보더니 손가락으로 내 입술을 거칠게 문질러 닦는다.....야....아파... 얼마나 세게 문질러 댔는지 입술이 심하게 부어오른다. 그렇게 보기 싫었냐...보기 싫으면 싫다고 말로 할 것이지....좀 너무하는 거 아니냐? 이렇게 까지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는 녀석이 원망스럽다. 립글로스 바른 입술에 이런 반응이라니....키스했다간 아주 밟아죽이겠다. "뭐하는 짓이냐?" 목소리가 낮게 깔린 게 등골이 싸늘하다. 안 죽으려면 잘 때 몰래 하는 수밖에 없겠다. "뭐가...." 모르는 척 시치미를 떼자 녀석은 싸늘한 눈동자로 쳐다보며 말한다. "몰라서 묻냐...." "...입술이 터서 발랐어....왜 사소한 데 신경질이냐?" 성재 녀석도 믿지 않는 뻔히 거짓말을 반복하자 녀석은 아무런 반응이 없다. "국사 노트나 빌려줘...." 녀석은 나지막하게 한숨을 쉬더니 책상 서랍에서 노트 한권을 꺼내준다. 필요 없는 국사 노트까지 빌리다니....정말 스스로가 한심스럽다. 씁쓸하게 터덜터덜 교실로 돌아오는데 재수 없게도 담탱이랑 딱 마주쳐 버렸다. 꾸벅 인사를 하고 지나가려는데 손가락을 까딱거린다. 왜 그러지? 요즘 야자를 빼먹었더니.....잔소리하려고 그러나.... "이지후.....네 신상 명세 카드 봤다. 부모님이 안계시냐?" "그런데요...." "두 분 다 돌아가셨니?" "아뇨...어머니는 재혼하셨는데요..." 이런 걸 왜 묻는거지? 호구조사라도 하고 싶은 건가.... "....그럼.....지금은 누구랑 살고 있냐?" "누나하고요...." 잠시 동안 침묵이 흐른다. 도대체 뭘 말하고 싶은건데.... "네가 괜찮다면 이번 장학금 대상에 널 추천할까 하는데.....어떠냐?" 그거였군............ "됐습니다. " "그런 건 저보다 어려운 다른 놈한테나 주시지요." "가보겠습니다." 친절을 가장한 동정은 가장 싫어하는 것 들 중 하나이다. 어려서부터 저런 눈빛은 정말 질색이었다. "싸가지 없는 새끼...기껏 신경 써 줬더니 태도하고는....." 등 뒤로 들리는 말이 내 발을 멈추게 한다. 씨발. 누가 신경 써 달라고 했어? 제 만족에 취해서 멋대로 동정해 놓고는...... 한마디 해주고 싶었지만 긁어 부스럼 만들기 싫어서 조용히 교무실을 나왔다. 나도 정말 성질 많이 죽었다.... 오늘 같이 공부 안돼는 날은 집에 일찍 가서 자는 게 상책이지.... 야자시간 내내 멍하게 있다가 책가방을 챙겨서 나왔다. 느릿느릿 걷고 있는데 전봇대에 기대선 인영이 보인다. 주경민.......정말 지친다.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걸 알았지만 녀석과는 정말로 얽히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그냥 지나쳐 버렸다. "할 말있어....이지후" '퍽' 녀석을 돌아보며 그대로 얼굴을 갈겨버렸다. 제대로 들어갔군... 주경민의 입주위가 터져있다. 비틀거리며 벽에 기대서는 녀석의 배에 주먹을 박아 넣자 경민은 쿨럭 거리며 바닥에 쓰러진다. 퍽.퍽.퍽. 쓰러진 녀석을 발로 걷어차자 몸을 웅크리며 내 발길질을 받아낸다. 기분도 안 좋았는데 네가 잘못 걸린 거라구... 때릴 곳도 없어 보이는 작은 녀석에게 계속해서 사정없이 발길질을 했다. 내가 걷어찰 때마다 녀석은 쿨럭 거리면서 심하게 부들거린다. "내가 분명히 경고했지......한번 더 내 앞에 알짱대면 밟아 버리겠다구..." "내 말이 껌같이 들렸나 보지?" 퍽.퍽.퍽.퍽.퍽. 계속되는 발길질에 녀석은 작게 꿈틀대더니 축 늘어진다. 널부러진 녀석을 쳐다보며 담배에 불을 붙였다. 예전부터 느꼈지만 이 녀석은 정말 타이밍이 안 좋을 때만 나타난다. 지독한 악연....유쾌하지 않은 만남..... 필터까지 타들어간 담배를 밟아 끄면서 녀석을 지나쳐 갔다. "어머니가 소중하게 아끼는 사진이 있었어...." '멈칫' "예쁜 남자아이의 사진이었는데.....수첩 속에 넣어두곤 몰래 꺼내보시더라..." "..........." "새로 생긴 다정한 어머니가 너무 좋았는데...나보다 사진 속에 그 앨 더 좋아하시는 것 같아서 화가 났었어....." "그래서 그 사진을 감춰 버렸는데.....내 짓인걸 아시면서도 아무 내색도 안하시더라...." "............" "그 날부터 매일 난 그 사진만 보고 있었어....어떻게 하면 이 애처럼 될 수 있을까? 난 이 애처럼 예쁘지 않으니까 어머니가 좋아해주시지 않는 걸까?" "............." "그러다가 너를 봤지.......사진 속 모습과는 많이 달랐지만 언제나 너를 보고 있었던 난 금방 알아 볼 수 있었어.....네게 다가가고 싶었지만.....너는 너무 차가워서 다가갈 수 없었다." "............." "너에겐 내가 기분 나쁜 존재일지 모르겠지만...나에게 너는 특별해..." 녀석은 힘없이 벽에 기대어 앉아 나를 똑바로 쳐다본다. 얻어터진 눈가는 잔뜩 부어올랐고 입술은 터져 피가 맺혀있다. 가로등 빛에 왜소한 경민의 몸이 더욱 가늘게 보인다. "어렸을 때부터 너는 항상 내게 특별한 존재였어....." "좋아해............" 쟈스민 티 <20> 뜨거운 열에 꽃을 피우는..... "좋아해............" 녀석의 조용한 고백은 나에게 별 감흥을 주지 못했다. 마치 횡단보도에서 신호가 바뀌는 것을 기다리고 있는데 모르는 타인이 말을 거는 것처럼 혹은 길을 묻는 것처럼 무감각하게 느껴졌을 뿐이었다. "좋아한다는 게 뭐냐? 내 물음에 주경민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나를 쳐다보기만 한다. "뭐.....대답 안해도 상관없어..." "어차피 변하는 건 아무것도 없을테니까......" "너와 나는 만날 수 없는 평행선이야.....어미니와 나도 마찬가지고..." "이 이상 너랑 얽히는 건 싫다. " 그래 이 이상 너랑 얽힌다면 나는 영원히 어머니에게서 벗어나지 못할꺼야.... 그리고 더 이상 표정을 지울 수 없게 된 난 결국 누나에게 상처를 주겠지...... "때려서 미안하다." "좋아해.............." 울음이 섞인 서글픈 목소리가 내 발걸음을 무겁게 한다. 그래도 나는 네 감정에 책임져 줄 수 없어. 네 애절한 고백에 흔들릴 만큼 난 다정한 놈이 아니란 말이다. 너도 어머니도 내겐 아무것도 아니라구............ "좋아해..." "정말 좋아해.....사랑한다구.....이지후...." 가로등 아래 주저앉은 창백한 소년이 울부짖으며 사랑을 말하지만 아무도 듣는 이 없다. 탕.탕.탕. 벽에 부딪힌 농구공이 다시 나에게로 돌아온다. 학교 갈 때만 해도 도진이랑 키스할 수 있을 거란 생각에 들떠 있었는데 녀석의 확실한 거부반응에 충격 받고 담탱이한테는 같잖은 동정이나 받고......주경민한테는 생각지도 못한 고백까지 받고......후.......오늘 하루 받은 건 정말 많은 데 기분은 왜 이렇게 더럽냐.... 주경민의 고백이 나를 심란하게 한다. 어떻게 자기 마음에 확신할 수 있을까? 나는 남잔데.....그런건 전혀 문제가 안된다는 건가? 좋아한다는 건 그렇게 자신의 마음 말고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거야? 이도진..... 다른 건 잘 모르겠지만 그래도 널 생각하면 기분이 좋아져..... 널 보면 가끔씩 가슴이 두근거려........ 네 녀석이 남자인걸 알지만 만지고 싶어.................. 왜 나는 이렇게 너에게 집착하는 걸까? 왜 내 심장은 너를 보면 두근거리지? 끝없는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내 머릿속을 마구 헝클어 놓는다. 아직은 너를 향한 이 감정이 단순한 욕정인지 사랑인지 나 자신도 잘 모르겠지만.... 만약 내가 고백하면 너는 받아 줄거냐? 겨우 깨달은 내 마음이 그 녀석의 고백처럼 너에게 아무런 감각도 불러일으킬 수 없다면 난 많이 슬플 것 같다. 응.....분명히 슬플꺼야.... 너는 다정한 놈이니깐........나처럼 차갑게 등 돌리진 않겠지.......그렇지? 쟈스민 티 <21> 뜨거운 열에 꽃을 피우는..... 아침에 일어나 밥 먹고 학교 가서 졸다가 적당히 시간 때우고 다시 집으로 돌아오고.... 다람쥐 쳇바퀴 돌 듯 따분하고 무의미한 일상이다. 3일 동안 학교에 나오지 않는 주경민이 신경 쓰였지만 뭐 병원에 잘 누워있겠지...... 나를 그렇게나 좋아해 준 놈인데 조금쯤은 걱정하는 것이 도리겠지만 나는 원래 이렇게 생겨먹은 놈이다. 내가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것 외에는 어떻게 되도 상관없다는 주의..... 그동안 틈틈이 기회를 엿보았지만 도진이 놈이 잘 때 몰래 키스하는 건 역시 비겁한 짓인 것 같아 그만뒀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천천히 생각해 봐야지....... 미술실 문을 열자 엷은 유화물감 냄새가 난다. 이젤 앞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어야 할 녀석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아직 안 왔나? 먼저 갔을 리는 없는데..... 의아함을 느끼며 소파쪽으로 다가가자 그 위에서 곤하게 자고 있는 녀석의 모습이 보인다. 뭐야...자고 있었냐? 키도 큰 녀석이 이렇게 잔뜩 웅크리고 자다니...... 자고 있는 녀석의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자 기분 좋은 표정을 짓는다. 빨간 입술을 반쯤 벌린 채 새근거리며 자고 있는 녀석을 바라보자 뜨거운 열이 머릿속을 마구 휘젓기 시작한다. 비겁한 짓은 그만두고 혼자서 천천히 생각해 보기로 마음먹었는데... 아주 잠깐 동안 이성과의 싸움이 있었지만 결국 난 18살의 사내 녀석이다. 이성이 이길 리 없지..... 녀석의 빨간 입술을 향해 천천히 다가가자 심장이 시끄럽게 쿵쿵거리기 시작한다. 왜 이렇게 시끄러운 거야? 평소에 느꼈던 것보다 거의 만 배는 빨리 뛰는 듯 하다. 점점 크게 들려오는 심장 소리를 무시하고 천천히 녀석의 입술에 내 입술을 대었다. 입술로 전해져 오는 따뜻한 열기..... 살짝 대고만 있는데도 아찔해 질 만큼 황홀한 감각이 온 몸을 관통한다. 두근. 두근. 두근. 미친 듯이 박동하는 심장과 척추를 따고 올라오는 감각에 놀라 황급히 입술을 떼었다.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이도진하고도 키스해보고 지금 느낌과 잘 비교해봐라." "그때 네가 느끼는 게 아마 네 진심일 거다." 이게 내 진심이라는 거냐.......유성재........... 어느 정도 예상하고는 있었지만 나는 정말로 이 녀석을 좋아하고 있었던 건가..... 심장이 두근거림이 왠지 기쁘다. 마음 한구석이 싸하게 아린다. 좋아한다는 건 이렇게 기분 좋은 감정이구나..... 조용히 미술실 문을 닫고 밖으로 나왔다. 아직까지 내 심장은 힘차게 뛰어댄다. 이렇게 심각하게 좋아하는데 그동안 왜 몰랐을까? 도진이 놈도 은근히 나한텐 약하니까 어떻게 잘만 하면 나에게 넘어오게 할 수 있을 것 같다. 우선 녀석이 좋아하는 타입에 가까워져야 하나..... 내 옆에서 걷고 있는 녀석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멍한 표정을 하고 있다. 살짝 벌어진 빨간 입술을 보자 아까의 키스가 생각나 얼굴이 화끈거린다. "이도진.....너는 어떤 타입 좋아하냐?" 아무렇지 않음을 가장하면서 무심하게 물어보자 도진이 녀석은 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빤히 쳐다본다. 왜 그렇게 쳐다보는 건데....괜히 찔리잖아.... "글쎄.........별로.....생각 해본 적 없는데....굳이 말하자면 늘씬하고 잘빠진 타입....인가..." 키 크고 잘빠진 글래머라니.....의외로 세속적이군....... 버겁긴 하지만 나도 일단은 키 크고 잘빠졌으니까 대상에서 제외되는 게 아니다. "그리고?" "뭐....얼굴이 예쁘면 좋겠지...." 그건 좀........무리일지도...... 어릴 때는 여자애 같이 예쁘장한 편이었지만 지금은 아닌데........ "갑자기 그런 건 왜 묻냐?" "................." "너 여태까지 여자애랑 사귄 적 없잖아.....터무니없이 눈이 높은 게 아닐까 하고..." 도진은 야하게 눈꼬리를 휘더니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걱정마.....사귀지 않아도 적당히 풀어주고 있으니까...." 그...그게 무슨.......너 그럼 아무하고나 놀아난단 말이야? 그렇게 꼴리면 나랑 하면 되잖아 새끼야.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목구멍으로 삼켜야 했다. 씨발........아무것도 관심 없다는 얼굴을 하면서 잘빠진 글래머나 밝힌단 말이지..... 나도 엄청 새끈한 놈인데.......나 같은 놈을 옆에 두고 머리 빈 글래머나 좋아하다니...... 속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면서 얼굴도 모르는 글래머 여자에게 괜히 살심이 생긴다. "학원에 가봐야 하니깐 여기서 찢어지자." 나도 모르게 빨리 걸었는지 내 몇 발자국 뒤에서 도진이 말한다. 네가 그런 무표정한 얼굴로 말할 때면 가끔씩 얄미워지는 거 아냐? 나는 이렇게 복잡한데 너는 아무렇지도 않은 것 같아서 화가 난단 말이다. "데려다 줄께...." 녀석과 조금이라도 더 같이 있고 싶었기 때문에 한번도 해본 적 없는 말을 내뱉었다. 이거 약간 부끄러운데... "좀 먼데...." "상관없어..." ".............." "왜 내가 가면 안되는 이유라도 있냐?" "......그런 건 아니지만........" 이 몸이 몸소 데려다 주겠다는데 그렇게 껄끄러운 반응을 보일 수 있냐. 오기가 생겨서라도 간다. 내켜하지 않는 녀석을 따라 무려 40분이나 걸어서 마침내 미술학원에 도착했다. 진짜 되게 머네.... "그럼 나 들어간다." 도착하자마자 횅하니 들어가 버리는 녀석이 원망스럽다. 널 좋아해주는 상대에게 너무 차가운거 아니냐? 이 더운 날 여기까지 데려다 줬는데..... 왠지 맥이 빠진다.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건 이런 기분도 드는 거구나..... 녀석이 들어가 버린 계단 입구에 주저앉아 담배를 피면서 멍하니 주위를 바라보았다. 교복을 입고 재잘거리며 지나가는 여고생들.....무언가에 쫓기듯 빠르게 가고 있는 회사원... 팔짱을 끼고 다정스럽게 걸어가는 연인들.......저런 게 자연스러운 것이겠지..... 도진이가 내 고백을 받아준다고 해도 우리는 저 평범한 군중들 사이에는 끼일 수 없을 것임에 분명하다. 나는 그래도 상관없지만 도진이 녀석은 어떨까? 쟈스민 티 <22> 뜨거운 열에 꽃을 피우는..... 뜨거운 태양에 머리가 익어버릴 것 같다. 2시간 쯤 지났을까? 계단에 주저앉은 채로 도진이가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어떤 여자가 내 쪽으로 다가온다. 누나만큼은 아니지만 꽤 미인이군.... "저기 지금 누구 기다려요?" "이도진.." "역시 그랬구나.......금방 알아 봤어.......실물도 되게 멋지네?" 여자는 묘한 눈을 하며 내 얼굴을 여기저기 뜯어본다. 저렇게 자신의 호기심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다니......이상한 여자군.....흥미 가득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여자를 무감각하게 바라보자 여자는 부드러운 표정을 지으며 내게 말한다. "아....저기 얼굴 좀 만져 봐도 되요?" 아직 대답도 안했는데 내 얼굴을 마음대로 만지고 있다. 이 여자 정말 뭐야? 너무나 당당한 여자의 페이스에 말려들어 멍하니 여자가 하는 대로 내버려두었다. "이지후." 계단 위를 올려다보니 도진이가 약간 얼굴을 찌푸리며 나를 내려다보고 있다. 드디어 나왔군..... 기다림이라는 건 그 사람만을 절실하게 생각하도록 만드는 것 인가보다. 머리가 익어버릴 정도로 더운 날씨에 쭈그리고 앉아 언제 나올지 모르는 녀석을 기다리는 동안 내 마음은 무의식적으로 녀석의 모습만을 쫓고 있었는지 홀연히 나타난 녀석에게 다가가 부서질 만큼 세게 끌어안고 싶다. 내가 널 얼마나 기다렸는지 아냐....... 반가운 마음에 일어서려는데 도진은 빠른 속도로 계단을 내려오더니 내 얼굴을 만지고 있던 여자의 손을 세게 쳐내었다. 순간 느껴지는 짜릿함...... "어머, 도진아...수업 이제 끝났니?" 여자는 상냥하게 웃으면서 잔뜩 찌푸리고 있는 도진에게 말을 건다. 저런 얼굴을 하고 있는 녀석한테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걸다니 역시 이 여자 보통이 아니다. 언제나 무표정한 얼굴이 아닌 노골적으로 표정이 드러난 녀석의 맨얼굴이 나를 두근거리게 한다. "일찍 왔으면 기다릴 뻔 했네...." ".................." 선약이 있었군...그래서 내가 따라오는 게 싫었던 건가? 조금쯤은 기대했었는데.... 이 여자가 아닌 내게 질투를 느꼈다는 거지.... 가슴이 무겁게 짓눌려 오며 급격하게 기분이 나빠졌다. 사귀지는 않아도 적당히 풀어주고 있는.....늘씬하고 잘빠진 글래머......얼굴이 예쁜 여자..... .......이런 거였냐? 가슴 속에서 뜨거운 것이 퍼져서.......온 몸이 불덩어리처럼 달아오른다. 여자의 얼굴을 노려봐준 뒤 도진의 팔을 끌어당겨 걷기 시작했다. 저 여자랑 함께 있는 녀석이 보기 싫다. 그 순간 내 머릿속에는 오직 그 생각 밖에 존재하지 않았다. 도진의 집에 도착하자마자 녀석을 소파에 밀어붙이고는 물었다. "그 여자 누구야?" "....아는 선배...." 무표정한 얼굴에 감정이 섞여있지 않는 건조한 목소리..... "....너.....그 여자랑........잤냐?" 다행히 목소리는 떨리고 있지 않다. 대신 심장이 미친 듯이 뛰어댄다. 내가 상관한 문제가 아니란 건 알아. 하지만 말해. 안 잤다고....그런 여자랑 관계없다고 말해줘...... 이제 그 여자랑 안 만날 거라고 말하란 말이야. "그건 왜...." 여전히 무감정한 목소리....정말 오늘처럼 네 빨간 입술이 원망스러운 적은 없었다. "난......네가 그 여자 만나는 게 싫다.....앞으로 만나지마....." "............" 말도 안되는 억지....무슨 권리로 이런 말을 하는지 내 자신도 잘 모르겠지만 네가 그 여자를 만나는 건 정말 싫단 말이야.... 도진은 가라앉은 아름다운 적갈색 눈동자로 나를 똑바로 쳐다보면서 조용히 말한다. "알았어........" "그러니까 이제 좀 놔줘.....아파...." 나도 모르게 힘을 줬는지 깜짝 놀라서 손을 떼자 새하얀 피부가 빨갛게 부어오른다. "미안...." "됐어......" 녀석은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을 하며 굳어 있는 나를 지나쳐 키친으로 들어간다. 내가 정말 왜 이러지? 점점 여유가 없어진다. 말도 안되는 억지나 부리고.... 뜨겁게 달아오른 열기가 나를 미치게 만든다. 컨트롤 할 수 없는 감정...... 모든 것에 무감각했던 나의 어디에 이런 뜨거운 열정이 존재하고 있었을까? 한참 차가운 물을 맞고 있자 내 머릿속을 휘젓고 다니던 뜨거운 것이 조금씩 식어간다. 이지후.... 조금씩 아주 천천히 다가가는 거다. 내게 특별한 존재이니 만큼 소중하고 특별하게 대하는 거야. 섣부른 욕망에 눈멀어 녀석을 상처 입히지 마라....... 정말로 소중하다면 상대를 배려하며 아껴줘야 하는 거다. 차가운 물을 맞으며 스스로에게 끝없이 암시를 건다. 욕실에서 나오자 도진이는 TV를 켜 놓은 채 소파에서 잠들어 있다 무방비한 녀석, 아무데서나 자는 건 네 녀석이잖아. 얇은 이불을 가져와 덮어주면서 녀석이 자는 얼굴을 쳐다보고 있자 뭔가 억울해진다. 누구는 너 때문에 심란해서 차가운 물로 목욕까지 했구만 너는 이렇게 쿨쿨 잠이 오냐? 새근새근 자고 있는 녀석이 너무 얄미워져서 쿠션을 들어 얼굴을 갈겨 버리려는 순간 빨간 입술이 클로즈업 되어 눈 속에 박힌다. '멈칫' 녀석의 빨간 입술에 미친 듯이 반응하는 내 심장이 내려가는 손을 멈추게 했다. 하얀 소파에 파묻혀 빨간 입술을 살짝 벌린 채 새근거리며 자고 있는 녀석은 코피가 날 정도로 유혹적이다. 녀석의 입술이 말한다. 키스해줘...키스해줘...키스해줘...키스해줘...키스해줘...키스해줘... 귓가를 후벼 파는 환청에 미쳐버릴 것 같다....... 안돼. 이지후..... 천천히 다가가기로 마음먹었잖아.....저 입술에 현혹되어선 안돼. 한순간의 욕망에 눈멀어서 녀석을 상처 입힐 생각이냐? 그래....날 표리부동하고 의지 약한 놈이라고 욕하고 싶으면 욕해라..... 무엇보다 난 성적 자극에 약한 지극히 평범함 사내새끼란 말이다. 결국 달콤한 유혹에 굴복해서 녀석의 입술에 내 입술을 살짝 대자 방금 마셨는지 엷은 쟈스민 향기가 내 입술로 전해져 온다. 역시 이러길 잘했어^^. 좀 더 대담하게 반쯤 벌려져 있는 입안으로 혀를 넣는 순간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는 적갈색 눈동자와 마주쳤다. 어버버버.... 깜짝 놀라 입술을 떼었다. 녀석이 소파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킨다. 어쩌지? 어떻게 변명하면 넘어가 줄까? 필사적으로 도진이 녀석의 눈치를 살피고 있는데 몸을 일으킨 녀석은 나에게 시선조차 주지 않은 채 탁자에 놓여 있던 담배갑에서 담배를 꺼내 물더니 나른한 몸짓으로 불을 붙인다. 새빨갛게 타들어가는 담뱃불과 침묵에 안절부절 못하면서 설득력 있는 변명거리를 생각하기 위해 한참 머리를 굴리고 있을 때 침묵을 지키던 녀석이 입을 열었다. "그걸로 만족이 되냐? '.....무슨......' 녀석이 내뱉은 말에 멍해져 있는데 도진은 갑자기 내목을 당겨서 진하게 키스하기 시작했다. 녀석의 행동이 당황스러웠지만 곧 그 촉촉함과 따뜻함에 취해 정신없이 녀석의 입안을 탐했다. "이번엔 도망안가냐...." '콰광'하고 머릿속에 폭탄이 떨어진다. "이도진.....설마...너....그 때......미술실에서.....깨어 있었냐?" 목소리가 심하게 떨린다. 내 물음에 녀석은 담배 연기를 내뿜고는 살짝 웃으며 말한다. "어..." 씨발, 얼굴에 피가 몰린다. 깨있었으면서 어째서 가만히 있었던 거냐. 응큼한 새끼..... "이지후. 너 나랑 자고 싶지?" "깔려 줄 테니까 한판 안할래?" 어째서 이 자식은 저런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거지? 느긋하게 담배를 피며 별일 아니라는 듯 무표정하게 말하는 녀석을 보자 배신감에 심장이 욱신거리면서 아프다. "그래.......이도진......난 너랑 자고 싶어......." "정말 미칠 듯이 널 원해......" "하지만, 너 겨우 그런 놈이었냐?"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네 몸을 내줄 수 있는 놈 이었냐구...." 새끼야....네가 나에게 이렇게 상처 줄 수 있냐? 점점 더 아파오는 심장과 함께 이유를 알 수 없는 눈물이 볼을 타고 내려와 바닥으로 떨어진다. 이 놈의 눈물은 시도 때도 없이 나오는군...... 가슴에 구멍이 나서 온몸의 피가 쏟아져 나올 것만 같다. "넌.....내가......날 그렇게....가볍게 생각했어?" "네게는 내가 그런 정도였냐구...." 눈동자에 눈물이 가득 차 시야가 뿌옇게 흐려져 녀석의 표정이 보이지 않는다. "넌 내 친구놈이고...." "나와 같은 사내새끼지만......" "너만 보면 이 놈의 심장이 미친 듯이 뛰어 대서 정말 돌아 버리겠는데...." "너에게 난 단지 한 순간의 욕정의 대상일 뿐이라는 거냐?" "................" "널 갖고 싶다.......정말 간절히 원해....." "단순한 욕정의 상대가 아닌.........네.....연인이 되고 싶어......" "이런 날 미쳤다고 할꺼냐?" 고여 있던 눈물이 흘러내리면서 시야가 또렷해진다. 도진은 신비한 적갈색의 눈동자로 나를 똑바로 쳐다보며 갈라진 목소리로 진지하게 말한다. "후회하지 않을 자신있냐...이지후...." "우린 이제 겨우 18살이고...." "지금 네가 나를 선택한다면 앞으로 다가올 많은 것들을 잃어버리게 될 텐데...." "그래도......나만 계속 바라봐줄 수 있냐?" 열기를 품은 갈색의 눈동자가 흔들리고 목소리 또한 미묘하게 떨리고 있다. "후회안할 자신 따위는 없어..." "하지만 만약 지금 내가 널 놓아버린다면......" "앞으로의 평생을 후회만 하면서 살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둔한 머리보다는 심장을 믿기로 했다." 거실에 고요한 정적이 흐른다.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던 도진은 살짝 입가에 미소를 짓더니 소파에서 일어나 천천히 내게로 다가온다. 한발자국, 한발자국, 거리가 가까워짐에 따라 심장 박동수가 급격하게 증가한다. "그럼 이 시간부터 내가 널 접수하지." "선택은 네가 했다는 걸 잊지 마라. 이지후" "내 손에 들어온 이상 절대 놓아주지 않는다." 녀석은 한손으로 내 목을 끌어당겨 그렇게 나지막하게 속삭이고는 귓속으로 혀를 집어넣는다. 순간 척추에서 올라오는 짜릿한 쾌감으로 나도 모르게 신음을 흘렸다. 도대체 이놈은 왜 이렇게 자극적인 거야? 내 귓바퀴를 자극해대는 혀를 더 이상 참을 수 없어서 간신히 녀석을 떼어내자 욕망이 가득 담긴 눈으로 나를 쳐다본다. 그 눈동자에 홀려 녀석의 붉은 입술에 키스한다. 정말 오래전부터 이렇게 하고 싶었던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반쯤 눈을 내려뜨고 속눈썹을 파르르 떨면서 따뜻한 혀로 내 입안을 거칠게 헤집는 녀석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유혹적이다. 어느새 우리는 알몸이 되어 있었고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서로의 몸을 더듬고 빨아 대기 시작했다. 거실에는 누구의 것인지 모르는 신음소리가 한가득 울려 퍼진다. 흥분해서 꼿꼿이 선 연한 갈색빛의 유두를 깨물자 강하게 허리를 튕겨온다. 하얗고 탄력 있는 녀석의 몸을 끝없이 탐하면서 녀석의 것에 내 것을 비벼대자 아래에서 올라오는 사정의 욕구가 나를 집어 삼킨다. 녀석의 아래로 내려가 발기한 그것을 한입에 삼키자 도진은 낮으면서 섹시한 한숨 같은 신음을 뱉어낸다. 욕망에 젖은 적갈색 눈동자와 살짝 벌어진 빨간 입술이 더할 수 없게 선정적이다. 죽이게 섹시하고 아름다운 놈......정말 너한테 미쳐버릴 것 같다. 긴 다리를 벌리고 천천히 녀석의 안으로 들어가자 무섭도록 죄어오는 따뜻한 내벽이 느껴진다. 부드럽고 따뜻한 내벽의 조임이 주는 황홀감에 취해 거칠게 피스톤 질을 시작하자 도진은 섹시한 낮은 신음을 흘리면서 내 허리에 다리를 감고는 적극적으로 허리를 흔들어 댄다. "앗......흑.......이...지후......읏.....영원히.....내게서...도망칠...생각.....학.....하지마라..." 대답대신 녀석의 몸속으로 더욱 깊이 파고들자 도진은 등을 크게 휘면서 나를 더욱 세게 죄어오며 욕망에 가득 찬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며 내 귓가에 속삭인다. "이지후............사랑한다.........." 그렇게 낮게 속삭이고는 엄청 야한 눈웃음을 치면서 내 머리를 잡아당겨 키스한다. 미치도록 사랑스러운 녀석......혀가 깊게 섞이면서 끈적한 타액을 만들어 내고 완벽하게 교합한 곳에서 올라오는 황홀한 조임에 몸을 떨며 녀석의 몸속 깊이 사정했다. 벌써 몇 번이나 사정을 해버린 도진도 나와 함께 절정에 도달한다. 서로에게 굶주려 있던 우리는 그렇게 몇 번이나 쾌락을 향해 달려갔다. 쟈스민 티 <23> 뜨거운 열에 꽃을 피우는.....by Do Jin 하얀 베게에 얼굴을 묻고 새근거리며 자고 있는 모습이 너무나 사랑스럽다. 긴 속눈썹을 내려 깔고 반쯤 벌린 입술사이로 고른 숨소리를 뱉어내면서 무슨 꿈을 꾸는지 입꼬리를 살짝 올리고 있다. 나랑 섹스하고 있는 꿈이라도 꾸는 건가..... 녀석의 올라간 입꼬리에 살짝 키스를 하며 귓가에 숨을 불어넣자 자는 와중에도 느껴지는지 희미한 신음소리를 낸다. 너는 네가 얼마나 매력적인지 모르겠지...... 이 녀석의 이런 모습은 정말 아무에게도 보여주고 싶지 않다. 그러고 보니 생각나는군.... 지후가 등나무 벤치에서 자고 있을 때 감히 이 녀석의 입술을 훔치고 있던 괘씸한 녀석... 반쯤 죽여 놨지만 아직도 분이 풀리지 않는다. 이 녀석의 자는 얼굴을 본 것만으로 눈깔을 파내고 싶은데 감히 키스를 해? 지후가 안 말렸으면 정말 그 조그만 놈은 이미 예전에 휠체어에 앉아 있을 거다. 알고 보면 따뜻하고 정 많은 녀석...... 어떻게 이토록 귀엽고 사랑스러운 녀석이 그렇게 차가운 얼굴을 하고 있었을까? 녀석을 처음 본 건 중1의 겨울이었다. 추운 날씨에 입김으로 손을 녹이면서 눈 쌓인 운동장을 그리고 있는데 갑작스러운 바람에 스케치 해두었던 것이 운동장 쪽으로 날아가 버렸다. 계단을 내려가 주으려고 할 때 누군가가 나보다 먼저 그것을 주웠다. 그 녀석은 내 스케치를 유심히 보더니 다시 나를 쳐다본다. "너 되게 그림 잘 그린다." 하얗고 예쁜 얼굴을 한 녀석이 추위에 얼굴을 붉게 물들이면서 희미하게 웃는다. 순간 그 모습이 마치 뜨거운 낙인처럼 뇌리에 뚜렷하게 박힌다. "난 그림 엄청 못 그리는데....부럽다." 뭔가 말을 해야 하는데 숨이 막히고 목구멍이 뜨거워져서 말이 나오지 않는다. "야....이지후...빨리 와 임마..." 이름이 이지후군.......왠지 얼굴에 어울리는 이름이다. "지금 간다." 좀 더 같이 있고 싶은데...이대로 헤어지는 건가? 그래도 같은 학교니까 자주 볼 수 있겠지. "아.....너 혹시 지금 돈 있으면 좀 빌려줄래?" 나는 지갑에서 만원을 꺼내어 지후에게 주었다. 이걸로 다시 만날 수 있겠지..... 나에게 돈을 받아든 녀석은 고맙다고 말하면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녀석에게로 뛰어갔다. 후에 안 일이지만 지후는 불량스럽게 노는 무리로 유명했다. 결국 난 삥을 뜯긴 거군.... 그 이후로 몇 번이나 지후랑 마주쳤지만 그는 날 기억하지 못했다. 나도 희미한 인상은 아닌데.....의외로 머리가 나쁜 녀석인가 보군....그 날 처음으로 난 섭섭함이라는 감정을 알게 되었다. 화려하고 정신없이 사람의 시선을 끄는 녀석은 그만큼 주위에도 무관심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차갑게 거부한다고 할까? 녀석의 차가운 분위기에 질려 아무도 지후에게 다가가지 못했다. 그런 주제에 어째서 넌 내게 그런 얼굴을 보여준거냐... 2학년이 되어 같은 반이 되었는데도 지후는 여전히 멍청한 유성재 같은 놈이랑 어울리며 나에게 시선을 주지 않았다. 그렇게 1년 동안 우리는 같은 공간에서 다른 세계를 살아갔고 동시에 내 스케치북은 온통 지후의 모습으로 가득 채워지기 시작했다. 녀석의 자는 모습, 농구하는 모습, 희미하게 웃는 모습.......녀석의 알몸을 상상하며 누드를 그리고 그 앞에서 자위하며 녀석을 향한 내 욕망을 달래었다. 다행스럽게도 3학년 때도 나는 녀석과 같은 반이 되었다. 지후의 성적을 알아내서 일부러 반편성 고사를 못 친 노력의 산물이긴 하지만..... 그러나 이대로 지내가단 평생 그림만 껴안고 살 것 같은 예감이 들어서 유성재를 교묘히 따돌리고 미술시간에 지후 옆에 자리를 잡았다. 인물화라니.... 오늘은 훔쳐보지 않고 당당하게 널 그릴 수 있겠군...... 그렇게 녀석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그림을 그리는데 상당히 진지한 얼굴을 한 지후가 온 신경을 집중해서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그 눈으로 나만 바라보고 내 모습을 그리다니....오늘은 정말 미치도록 행복한 날이다. 열심히 그리고 있는 스케치북을 쳐다보자 눈 두개 코 하나 입 하나 말고는 나와 공통점이 없어 보이는 괴물이 그려져 있다. 아무리 그렇지만 이건 너무한 거 아니냐? 설마 네 눈에 내가 이렇게 보이는 건 아니겠지........ 내 시선을 느꼈는지 녀석은 흘낏 나를 쳐다보더니 인상을 살짝 찡그리며 내 스케치북을 빼앗아 간다. 왜 저러는 거지? 내 그림을 뚫어지게 쳐다보던 녀석은 묘한 표정을 하며 나를 바라본다. 평소의 무감각하고 차가운 얼굴이 아닌 약간의 호기심과 흥미를 담은 눈..... 그 얼굴을 보니 왠지 처음 만났을 때가 생각나서 나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지어지며 눈꼬리가 휘어진다. 왜인지 이유는 모르지만 그 후로 지후는 내가 자신에게 다가가는 것을 허락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차가운 벽을 허물고 녀석이 먼저 내게로 다가왔다. 내 그림이 마음에 들었나? 그럴 줄 알았다면 진작에 보여 주었을 텐데.... "무슨 생각 하냐?" 잠이 덜 깬 낮게 깔린 목소리가 섹시하다. "깼냐?" "흐음~지금 나 그리는 거냐?" "어." 베게에 얼굴을 묻고 엎드려 있던 지후는 꼼지락대면서 허리에 감고 있는 시트를 아래로 떨어뜨리고 하얗고 아름답게 근육이 잡힌 나신을 드러내면서 도발적인 눈동자로 나를 쳐다본다. "이 편이 훨씬 낫지 않냐?" "확실히 낫긴 한데.....너무 자극적......." 내 말을 들은 녀석은 씨익 웃더니 허벅지를 더욱 벌리면서 엉덩이를 살짝 든다. 순간 '뚝' 하고 이성의 줄이 끊어진다. 네가 날 자극한 거야....후회나 하지마라. 이지후..... "야.....이 새끼...너 뭐하는 거야? 빨리 안내려와?" "싫은데....나만 깔리라는 법 있냐?" 녀석의 매끄러운 척추 선을 핥으면서 벌어진 허벅지 사이의 그곳으로 손가락을 넣자 녀석의 애널이 무섭게 조여온다. "흐윽....이도진.....너 안 빼? 죽고 싶냐? 어디에 손을.....헉." 손가락을 하나 더 넣자 시트를 세게 쥐며 부들부들 떨어댄다. 지후의 따뜻한 내벽을 긁으면서 손가락 수를 늘리자 느껴지는 지 서서히 허리를 놀리기 시작한다. "도발한 건 너야.....얌전히 있으면 기분 좋게 해줄께....." 매끄러운 등에 키스를 하면서 점점 아래로 내려가 토실한 녀석의 엉덩이 이를 세웠다. "흐읏....이도진......" 시트를 세게 쥐며 신음을 참는 녀석이 너무 매혹적이다. "좀더 엉덩이를 들어...이래선 넣을 수가 없잖아....." "내가 하던 것처럼 해봐........" 그렇게 속삭이며 녀석의 분신을 살짝 자극하고 떨어지길 반복하자 녀석도 욕망을 참을 수 없는 지 엉덩이를 들어 내 것에 문지른다. 새어나온 정액에 녀석의 애널이 촉촉해지자 천천히 내 것을 녀석 안으로 밀어 넣었다. 순간 나를 쥐어짜는 황홀감......좁고 따뜻한 녀석의 내벽은 나를 미치게 했다. 그 황홀한 감촉을 즐기면서 마구 지후의 안을 쑤셔대자 지후도 낮은 신음을 흘리면서 허리를 흔들어댄다. 내 아래서 신음을 흘리면서 음란하게 허리를 흔들어 대는 녀석이 정말 미쳐버릴 정도로 선정적이다. 자세를 바꿔가며 그렇게 녀석의 안에서 몇 번이나 절정을 맞았다. "좀 괜찮냐?" 녀석의 허리에 얼음찜질을 해주면서 묻자 지후는 나를 노려보며 날을 세운다. "이도진.....너 몇 번이나 해댄거냐?" "........계집애도 아닌데......깽알 거리기는...." "기필코 널 죽여준다. 이도진....아예 일어서지도 못하게 만들어 주마...." 이를 갈아대는 지후를 보니 웃음이 나온다. 귀여운 녀석..... ".....너한테 죽기 전에 실컷 깔아봐야 겠다...." "안 좋아 보여서 참았는데..........그럴 필요 없었군..." 그렇게 말하면서 녀석의 등을 부드럽게 쓰다듬자 지후는 분한지 사시나무 떨 듯 떨기 시작한다. 차가운 외모에 안 어울리는 따뜻한 영혼을 가진 녀석.... 널 가진 그 날부터 내 쟈스민 꽃은 피기 시작했다. 5년이나 걸렸지만 너의 따뜻한 영혼에 천천히 피기 시작한 나. 내 향기로 널 취하게 해서 영원히 내 속에 가둬 버릴거다. 너는 영원히 나의 것...................사.랑.한.다. 쟈스민 티 <24> 뜨거운 열에 꽃을 피우는..... "야...너 요즘 되게 열심이다." 정리하고 있던 노트를 툭툭 치며 성재가 시비를 걸어온다. 간만에 자율 학습 시간에 남아 있는다 했더니 또 저질 만화나 읽고 있냐? 하여간....세월이 가도 절대 안 변하는 놈..... "이제 고3이니까 공부 좀 해두려고...." 그렇게 말하고 다시 책으로 눈을 돌려 언어 영역의 문제를 풀기 시작했다. 한참 집중해서 지문을 읽고 있는데 눈앞에 다리를 쫙 벌리고 있는 섹시한 누님의 사진이 펼쳐진다. 기껏 집중 잘하고 있었는데.... "쉬엄쉬엄 하라구. 이지후, 그러다 병나겠다." 성재의 싱글거리는 낯짝을 한번 노려봐준 뒤 내 앞에 펼쳐진 에로 잡지를 녀석의 얼굴을 향해 던졌으나 녀석은 그것을 유유히 피하곤 내 어깨에 손을 올리며 이죽댄다. "네가 나랑 안 놀아주고 그딴 책이나 보고 있으니까 무지 외롭잖아." "그러지 말고 야자 째고 나랑 나이트 가서 찐하게 놀자." 악마 같은 새끼......그게 예비 고 3한테 할 소리냐? "안돼. 공부할거야." 일부러 차갑게 뚝뚝 끊어 말하고 다시 책에 집중하자 성재 녀석도 약간 열 받았는지 책상을 세게 걷어차며 무지하게 큰 소리로 중얼거린다. "씨바....지가 언제부터 그렇게 열심히 공부했다고...." 쾅.쾅.쾅. 녀석의 발에 걷어차인 책상은 앞의 의자에 부딪혀서 그곳에 앉은 녀석에게 상당한 충격을 주고 있었지만 그 녀석은 가만히 숨을 죽인 채 뚫어지게 책만 쳐다보고 있다. 교실에는 무서울 정도로 정적이 흐른다. 그 순간을 타이밍 나쁘게 지나가던 담탱이한테 걸려서 성재 녀석은 열나게 깨지고 이 추운 날 복도 밖에 서서 벌을 서고 있다. 후우....조그맣게 한숨을 쉬고 복도로 나가자 벌을 서는 건지 놀고 있는 건지 녀석은 담배를 꼬나물고 나를 노려본다. 저러다 걸리면 어쩌려고.....간 큰놈..... "미안하다." "..............." "요즘 좀 조급해져서 말이야....." "성적이 나쁜 편은 아니지만........역시 도진이 놈하고 같은 대학에 가고 싶어서.....삐졌냐?" "...........그놈......어디로 간다는데?" 쳐다보지도 않고 낮게 갈린 목소리로 물러보는 걸 보니 짜식 완전 삐졌군... "H대." ".......하여간 재수 없는 새끼..." 성재는 피고 있던 장초를 창틀에 비벼 끄고는 창 밖으로 던져버린다. 7년이나 붙어 있으면서 나는 이 놈이 공중도덕 지키는 꼴을 한번도 못 봤다. "........너......그 새끼 말고 나랑 같이 가주면 안되냐?" "네 놈 성적으로 갈 수 있는 데가 있긴 있냐? 지방 쪽으로 가기는 싫다." "씨발....누가 대학 같이 가자고 그랬냐? 이 둔한 새끼야...." 그럼 어디를 같이 가자는 건데? 가방을 싸서 밖으로 나오니 매서운 칼바람이 얼굴을 에인다. 아~겨울이 너무 싫다. 성재 녀석은 이 추운 날 목도리도 안하고 달랑 교복마이 하나만 입은 채 멍청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겨있다. 훤하게 드러난 목이 너무 추워 보여서 매고 있던 목도리를 풀어 성재의 목에 감아주며 말했다. "너 이렇게 춥게 하고 다니면 감기 든다." 털이 복슬복슬한 2m 가까이나 되는 하얀 목도리를 녀석의 목에 둘둘 감자 마치 거대한 눈사람 같이 보인다. "ㅋㅋㅋ 너 지금 무지 웃긴 거 아냐?" 성재를 쳐다보며 큭큭 거리며 웃자 녀석은 얼굴을 찌푸린다. "추위도 많이 타는 새끼가 뭐하는 짓이냐?" "걱정마. 나는 또 있거든...." 그렇게 말하면서 손난로 용으로 넣어두었던 핑크색 목도리를 가방에서 꺼내어 목에 둘렀다. "너 이새끼....쪽팔리지도 않냐? 색깔이 그게 뭐냐?" 이 색깔이 좀 부담스럽긴 하지.. 그래서 그동안 차마 목에는 못하고 쭉 손난로 용으로 썼던 건데.... 지금이 찬물 더운물 가릴 때도 아니고.... "누나가 짜 준거다. 나한테 잘 어울린다고 하던데...많이 이상하냐?" "씨발 눈이 썩으려고 그런다." 성재는 지나치게 오버하면서 성큼성큼 앞서 걸어간다. 그렇게 이상하나? 전부터 조금은 신경 쓰였는데 성재의 말을 듣자 왠지 사람들이 나만 쳐다보는 것 같아 무지 신경 쓰인다. 따뜻한데 들어가자마자 벗어야지.... "근데......이도진 하고는 잘 되가냐?" "어......네 덕분이다." "............." 한참동안 말없이 걷던 성재가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나를 돌아본다. "미안한데....갑자기 볼 일이 생각났다. 너 먼저 가라....." 뭐야....기껏 자율학습도 안하고 따라와 줬더니...변덕스러운 놈... 성재와 헤어지고 돌아오는데 너무너무 추워서 결국 공중전화 부스 안으로 들어왔다. 그나마 여기는 좀 낫군....코트에다 목도리까지 했는데 왜 이리 추운 걸까? 유리 밖으로 사람들이 추위에 잔뜩 움추린 채 종종걸음으로 걸어가는 것이 보인다. 다시 저 세계로 나가야 한다니....... 온도차로 인해 부스의 유리가 뿌옇게 흐려진다. "................" 티 없이 뿌옇게 생긴 성애를 보면 누구나 하고야 마는 행동..... 나 역시 그 정해진 행동 패턴을 벗어나지 못하고 하얀 성애 위에 글씨를 쓰기 시작했다. 뽀독. 뽀독. 뽀독. 좀 유치한가? 계집애 같아서 약간 창피했지만 다 쓰고 나서 바라보자 왠지 흐뭇하다. 빙긋이 웃으며 내가 쓴 것을 한참동안 바라보고 있는데 갑자기 핸드폰이 울린다. "여보세요." "아...도진이냐? 응? 지금?............나 지금 밖인데......어...괜찮아.....그래 지금 갈께.....알았어....끊는다." 전화를 끊은 지후는 유리에 쓰여진 글씨를 다시 한번 쳐다보고 행복한 얼굴을 하더니 목도리를 단단히 동여매곤 부스에서 나와 어딘가로 뛰기 시작한다. 지후♡도진 유리에 써진 글씨가 방울져 물방울로 흘러내리기 시작한다. 쟈스민 티 <25> 뜨거운 열에 꽃을 피우는..... "소희야....오늘 성재 형 좀 이상하지 않냐?" "..............." "벌써 몇 병째냐? 저러다가 위에 구멍이라도 나면 어떡하냐?" 무수히 많은 술병들이 테이블위에 쌓여져 있고 성재는 멍한 얼굴로 계속 술잔을 비우고 있다. 성재 옆에 찰싹 붙어있던 여자애들도 뭔가를 느꼈는지 예전에 다 도망가 버렸다. 병에 남아있던 술을 한 번에 마셔버린 뒤 성재는 소파에 기대어 눈을 감는다. 포기했다고 생각했는데...새삼스럽게 이런 기분이 되다니.......나도 아직 멀었군. 녀석은 나에게 언제나 특별했다. 어릴 때부터 나는 덩치가 크고 성질이 더러웠기 때문에 아무도 날 건드리지 않았고 같은 반 녀석들은 무서워하며 나와 놀아주지 않았다. 꼬봉은 잔뜩 있었지만 정말 내가 좋아서 어울려주는 녀석은 단 한명도 없었다. 그래...그러고 보면 난 어릴때부터 군중속의 고독을 느끼고 있었지..... 처음 녀석을 만난 건 지후 녀석이 고학년 형들에게 개기다가 실컷 얻어맞았을 때였는데 그때 나는 엄마가 심부름 하라고 준 돈을 삥땅쳐서 먹고 싶은 만큼 원 없이 붕어빵을 사먹고 남은 돈으로 아이스크림을 빨며 동네를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집에 들어가면 엄마한테 죽도록 얻어맞을 것 같아서 같은 곳을 몇 번이나 빙빙 돌고 있는데 6학년 형들이 외진 골목에서 어떤 녀석을 괴롭히고 있는 것이 보였다. 마침 심심했는데 구경이나 할 생각으로 가까이 다가가자 예쁜 얼굴을 한 남자애가 무표정한 얼굴로 자신을 괴롭히는 무리를 쳐다보고 있었다. 보통 저렇게 덩치 큰 놈들이 괴롭히면 잘못한 게 없어도 울면서 비는데.......특이한 놈이네..... 그 예쁜 녀석에게 흥미가 생겨 계속 관찰을 하고 있는데 녀석의 눈빛이 건방지다고 생각했는지 6학년 녀석들이 녀석을 무자비하게 때리기 시작했다. 다른 덴 몰라도 얼굴을 피해 줬으면 좋겠군......... 세 명에게 얻어터지면서도 녀석은 신음소리하나 내지 않는다. 한참 예쁜 놈을 때리던 녀석들은 스트레스를 다 풀었는지 유치한 말을 지껄이곤 사라진다. "너 얼굴 안 다쳤냐?" 가까이에서 본 녀석은 생각했던 것 보다 훨씬 예뻤다. 하얀 얼굴에 크고 까만 눈....인형같이 긴 속눈썹과 앙증맞은 핑크색의 입술.... 우리 반에서 제일 예쁜 희진이도 녀석의 미모에 비하면 정말 발톱의 때에 불과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에 구해줄걸..... 예쁜 녀석에게 잘 보일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놓쳐버린 내 자신이 너무 밉다. 내 등장이 놀라웠을 텐데 그 녀석은 아무런 표정 없이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다 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탈탈 털었다. "우리집에 안갈래? " "............." "나 심심하니까 나하고 놀자...." 녀석은 역시 어린애답지 않은 무표정으로 일관했지만 난 녀석의 손을 억지로 잡아끌며 집으로 향했다. 물론 이 녀석을 데려가서 엄마의 몽둥이를 면해보자는 얄팍한 계산도 깔려있긴 했지만 정말로 순수하게 녀석에게 호감을 느꼈다. 지후가 돌아간 뒤 잔머리 굴린다고 평소보다 더 얻어맞았지만 너무 기분이 좋았기 때문에 그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내일 학교에 가면 다시 녀석을 만날 수 있다는 생각에 가슴이 두근거려 잠을 이룰 수 없어서 한참을 뒤척이다 물을 마시러 나오는데......놀라운 얘기를 들어버렸다. 지후의 아빠가 1년 전에 교통사고로 죽고 엄마는 6개월 전에 보험 관계자와 재혼해서 지후와 그 애 누나를 버렸고 지금은 남겨진 아빠의 보험금으로 고등학생인 누나와 둘이서 살고 있다는 얘기.......어떻게 그렇게 예쁜 애를 버릴 수가 있지? 생각지도 못했던 사실을 알고 나자 녀석의 어린애답지 않은 무표정한 얼굴이 떠올랐다. 웃으면 더 예쁠 텐데...... 그렇게 생각하자 정말로 참을 수 없게 녀석의 웃는 모습이 보고 싶어 졌다. 무슨 짓을 해서라도 네가 환하게 웃는 걸 보고 싶어. 엄마 아빠가 가버려서 웃을 수 없다면 내가 네 옆에서 있으면서 웃게 해줄께... 그렇게 결심한 난 다음 날부터 녀석을 웃기기 위해 정말 난 별 짓을 다했다. 지후를 괴롭혔던 녀석들을 찾아내 콧구멍에 오백원짜리 동전을 억지로 집어넣기도 하고 실컷 두들겨 팬 후 여학생들 앞에서 팬티만 입힌 채 엉덩이로 이름쓰기 시키고......심지어 화장실에 온 녀석들에게 볼일을 못 보게 해서 결국은 옷에 싸게 한 적도 있었다. 물론 내 한 몸 불사질러 녀석을 웃게 할 수도 있었지만 나는 녀석의 앞에서만은 절대 망가질 수 없었기에 그동안 지후를 괴롭히던 녀석들이 주로 내 타겟이 되었다. 나의 행각에 처음에는 무표정으로 일관하던 녀석도 점점 표정을 보여주기 시작해서 나는 언제나 가장 가까운 곳에서 녀석이 언뜻 언뜻 보여주는 미소에 행복할 수 있었다. 그래......이도진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이도진은 꽤나 야하게 생긴 녀석으로 지후 녀석과 다른 종류의 차가움을 가지고 있었다. 자신과는 이질적인 느낌을 가진 녀석에게 동질감이라도 느끼는 듯 지후는 차갑고 단단한 벽을 허물며 녀석에게 다가갔고 내가 온갖 노력을 한 끝에 볼 수 있었던 미소를 너무나 간단히 녀석에게 보여주었다. 너는 나에게 특별해...... 네가 웃는 모습을 보고 싶다...... 너를 사랑해...... 그런데 너는 다른 놈을 보고 웃는구나..... 어느새 스스로 인정해 버린 감정을 다잡으며 친구의 얼굴로 녀석의 가장 가까운 곳에 있으며 자신의 감정을 깨닫지 못하는 지후에게 쓸데없는 충고까지 해가면서 등 떠밀었을 때는 언제고 정말 한심하게 왜 이러는 거냐......유성재....... 나는 겁쟁이다. 그 녀석의 미소를 잃는 것이 무서워서 가증스러운 얼굴로 친구를 연기해왔다. 그렇게 하면 넌 나를 영원히 놓지 않을 테니깐... 늦게 나타난 주제에 너를 완전히 차지하려는 이도진 그 놈이 밉다. 정말 죽여 버리고 싶을 정도로 증오스러워...... 머릿속에서 웅웅 울려대는 목소리가 내 이성을 점점 갉아먹어 간다. 내 옆에서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있던 소희가 내 귓가에 핸드폰을 갖다대자 낮고 그리운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유성재.....너 위에 구멍 나도록 술 퍼고 있다며? 돈은 있냐?" "이지후........" "그 자리에 있어라.....괜히 나대다가 길에서 얼어 죽지 말고......지금 거기로 갈 테니까 소희 바꿔라...." "싫어....." "싫긴 뭐가 싫어? 빨리 바꿔!" "이지후.....내가 왜 너랑 친구...........해줬는지 아냐?" ".............변덕이 죽 끓는 네 속을 내가 어떻게 아냐?" "네 놈 얼굴이 마음에 들어서다........못생겼음 너랑 친구 안했다." "........이상한 놈......" 내 귀에서 핸드폰이 떨어져 나간다. 녀석의 목소리를 좀 더 듣고 싶은데..... "아....지후선배.....여기......레드문인데요.....예.....예....그럼 부탁....니다." "뭐야 끊었냐?" "네.....지후선배 곧 오신답니다. 좀 괜찮아요...형?" "소희. 네가 지후한테 연락했냐?" ".............네.......주제 넘었다면 죄송해요..." 덩치는 커다란 녀석이 강아지 같은 눈을 해가지고선..... 소파에 몸을 기대며 눈을 감자 아까까지 머릿속을 울려대던 목소리가 잡음 하나 없이 사라져간다. 너는 내 만병의 근원......또한 나의 만병 통치약...... 네 목소리는 깨지도록 아픈 내 머리를 치유하며 나아가던 내 심장을 아프도록 찔러댄다. "아니.......오히려 고맙다." 녀석에게 들키기 전에 빨리 이 마음을 지워야 하는데... 장난처럼 해버린 녀석과의 키스가 자꾸만 내 마음을 어지럽힌다. 그 순간의 미칠 것 같은 황홀함,,,,,너에게는 별 의미 없는 그저 나쁘지 않은 키스였지만 내게는 뜨겁게 달군 쇠로 지진 화상이 되어 마음속에 묻어두려는 널 끊임없이 일깨우며 달콤한 고통을 준다. 후우~팔자에 없는 얄궂은 짝사랑이라니.......정말 스타일 구기는 군... 술기운이 돌기 시작하는 지 머리가 어지러워지면서 머릿속이 마비되어 간다. 차라리 술기운이라도 빌어서 이 미쳐버릴 것 같은 마음을 말해버리고 싶은 마음과 말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내부에서 격렬하게 충돌한다. 이지후..........빨리 와라............네가 미치도록 보고 싶다. 설사 평생을 포기 못해 계속해서 이런 괴로움에 시달린다고 해도..... 네가 원한다면 난 영원히 가식의 얼굴을 한 채 네 친구를 연기할 거다. 영원히 네 곁에 있어 줄꺼야..... 술에 취해 헤롱 거리면서 지후가 오기만을 기다리던 성재가 마침내 술기운을 이기지 못하고 잠들어버리자 옆에서 묵묵히 자리를 지키고 있던 소희가 성재에게 다가와서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쓸어 올린다. 부드러운 손길에 기분 좋은 환상이라도 보는지 성재는 아주 행복한 표정을 지으며 작은 소리로 뭔가를 중얼거린다. 소희는 이따금씩 지후의 이름을 부르며 잠꼬대를 하는 성재를 무릎위에 눕히고 다정하게 머리카락을 쓸어주며 한참을 바라보다 자장가 같이 조용하고 고요한 목소리로 속삭인다. "형이 지후선배를 사랑하는 것처럼 나도 형을 사랑해요." -完- Happy Birthday to you. <외전 1> 그게 어디로 간 거지? 언제나 여기에 있었는데.... 온 방안을 다 뒤집어엎었는데도 보이지 않는다. 젠장........ 시계는 벌써 12시를 가리키고 있다. 이 이상 꾸물대다가는 수업시간에 늦을 텐데.... 초조함을 느끼며 정신없이 찾다가 할 수 없이 집을 나섰다. 수업 따위 빠져버리고 계속 찾고 싶지만 오늘은 빠질 수 없는 누드화 수업이기 때문에 할 수 없이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그게 없으니 도무지 안정이 안되는군.... "6호관 앞에 서있는 남자애 봤니? 정말 괜찮지 않아?" "아...그 선글라스 낀 애.....눈이 안보여서 잘 모르겠던데..." "야....꼭 눈을 봐야 아냐? 골격이 틀리잖아....골격이....." "게다가 분위기도 엄청 쿨 한게 진짜 멋있더라......여자 친구 있을까?" 여자들은 저런 걸로 저렇게 신나게 떠들 수 있는 구나....... 대충 정리하고 나가려는 순간 그동안 가만히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여학생 C가 입을 연다. "혹시 경영학과 이지후 말하는 거 아니니?" '멈칫' "이지후? 그 애 이름이 이지후야?" "경영학과 킹카 이지후도 모르니? 얼음 왕자님으로 유명하잖아......" 얼음 왕자님? 풋....전혀 안 어울린다. "분위기가 너무 차가워서 아무도 못 다가가고 보기만 한다고 그러더라....." "호리호리하고 쿨하게 잘생겨서 좋다고 목매는 여자애들도 엄청 많다던데...." 녀석에 대한 여자들의 수군거림을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아서 작업실을 나와서 6호관 입구 쪽으로 걸어갔다. 검은 나시티에 하얀 반바지, 갈색 선글라스를 낀 평범한 모습인데도 녀석은 언제나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한쪽 벽에 기대서 있던 녀석이 손을 들어 내게 아는 척 하자 그와 동시에 나를 향해 무수한시선들이 쏟아진다. 지금까지 저 시선들이 녀석을 봐왔다는 것을 생각하니 상당히 불쾌하다. "뭐...기분 나쁜 일 있었냐?" 지후는 선글라스를 벗으며 내 얼굴을 유심히 바라본다. "....아니....그거 다시 써..." 억지로 지후에게 선글라스를 씌우고는 녀석의 손을 잡아끌고 황급히 그 곳에서 벗어났다. 초초한 마음에 엄청 빠른 걸음으로 걷고 있는데 지후가 갑자기 내 손목을 잡아당겨 돌려 세운다. "이도진....도대체 무슨 일이야.....너 지금 굉장히 불안해 보여....." 걱정스러운 말투......내가 정말로 그렇게 불안해 보여? 아무런 대답 없이 녀석을 쳐다보자 지후는 조그맣게 한숨을 쉬더니 나보고 '잠깐 기다려' 라고 말하더니 어딘가로 사라진다. 이대로 나에게서 사라져 버리는 건 아닐까? 녀석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다시 불안감이 고개를 든다. 다행히도 지후는 잠시 후 이온음료와 케이크를 들고 다시 내 앞에 나타나 주었다. "마셔...." 녀석이 준 포카리스웨트가 혈관을 타고 온몸으로 퍼지면서 불안감을 조금씩 지워준다. "웬 케이크냐?" 다 마신 캔을 쓰레기통에 넣으며 묻자 녀석은 나를 뚫어지게 쳐다본다. "............" "정말 모르는 거냐? 오늘 네 생일이잖아....." 그랬던가....... 지후는 내 상태가 안 좋아 보였는지 자꾸 집으로 가자고 재촉한다. 지금 집안이 엉망진창 일텐데.... "생일 선물이다." 지후가 심플한 실버링으로 감겨져 있는 종이를 내민다. 링을 빼어내고 감겨져 있던 종이를 펴자 오늘 아침 내내 찾고 있던 것이 전혀 다른 모습으로 내 눈앞에 나타났다. "............." "마음에 드냐?" "그거 찍는다고 입술 부르트는 줄 알았다. 립글로스로는 약한 것 같아서 립스틱으로 해봤는데 잘 찍혔지?" 고등학교 때부터 내 보물이었던 하얀 종이 위에는 립글로스로 찍어낸 입술 자국을 중심으로 빨간색부터 주황색, 핑크색, 보라색 까지 다양한 색깔의 입술자국이 선명하게 찍혀있었다. "난 개인적으로 그쪽 끝에 있는 핑크색 펄이 마음에 들던데...너는 어때? 이 순간만큼은 무표정한 내 얼굴이 싫어진다. 어떤 표정을 지어야 지금의 내 마음을 제대로 전달할 수 있을까? 따뜻한 검은 눈동자가 나를 보며 살짝 웃음 짓는다. 가슴 벅차 오르는 감동에 녀석의 목을 내 쪽으로 끌어당기며 강하게 입 맞추었다. "어지간히 기쁜가 보구나. 이도진.......하지만 역시 진짜가 좋지?" 다시 내게 입 맞추며 지후가 입술위에서 속삭인다. "근데 반지는 안 껴 볼거냐?" 그제 서야 나는 테이블에 놓아둔 깔끔한 실버 링을 천천히 손가락에 끼웠다. ".............." "너무 크잖아....." "멍청한 놈....이건 엄지손가락에 끼는 거다." 지후는 내 중지 손가락에 끼워져 있던 반지를 빼내어 다시 엄지손가락에 끼워 준다. JIHU-LEE-DOJIN 굵고 깔끔한 실버 링에 지후와 내 이름이 또렷하게 새겨져 있다. "이니셜 반지는 너무 흔해 빠져서 화끈하게 전부 새겨 넣었다. 멋지지?" "근데....왜 하필 엄지에 끼는 거냐?" "넌 그림 그리니깐.....언제나 엄지손가락만 보일 거 아냐...." 무둑뚝하게 말하고는 부끄러웠는지 얼굴을 붉히며 자신의 약지 손가락에 끼여져 있는 똑같은 디자인의 반지를 손으로 가린다. 이 이상 너에게 반하게 만들어서 어쩌려는 거냐. 이지후...... "어차피 반지는 왼손에 끼니까 상관없는데...." "씨발...줘도 말이 많다.......야. 다시 내놔." 창피했는지 얼굴을 새빨개져서는 내 손목을 세게 잡는다. 내 손목을 잡고 있는 지후의 손목 안쪽에 경애하는 마음을 담아 키스를 하며 바지위로 녀석의 것을 더듬었다. 그리고 그대로 녀석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지퍼를 열고 흥분한 녀석의 것을 꺼내 입안으로 삼키자 숨을 들이키는 소리가 들린다. 거대하게 커진 것이 목구멍까지 가득 차 숨쉬기 괴로웠지만 최대한 지후가 느낄 수 있도록 아주 정성껏 빨았다. 난 표정으론 마음을 잘 표현 못하니깐......몸으로 네게 보여줄께..... 천천히 혀를 놀리며 위를 올려다보자 반쯤 눈을 내려 깔고 낮은 신음을 흘리는 지후가 보인다. "그만...도진아....나올것..같아...." 녀석의 손이 내 머리를 떼어내려 했지만 나는 그것을 더욱더 깊이 목구멍 안으로 집어넣으면서 강하게 빨아들였다. "헉" 지후가 몸을 가늘게 떨며 내 목구멍 깊이 사정한다. 목줄기를 타고 흘러내리는 정액을 쿨럭 거리며 삼켜버리자 뱃속에서 묘한 만족감이 느껴진다. "야....그걸 왜 삼켜..." 당황한 표정을 한 녀석을 바라보며 입가에 묻은 정액을 손으로 닦아 다시 혀로 핥자 지후의 눈이 휘둥그렇게 커진다. "시끄러....찐하게 서비스 해주겠다는데..........불만 있냐?" 바지의 버클을 풀고 브리프와 함께 벗어 내리고 녀석을 쓰러뜨리고 위로 올라탔다. "아주 미치게 해줄 테니까.....넌 잠자코 즐겨..." 녀석의 목젖을 핥으면서 중얼거리자 지후는 할 수 없다는 눈을 하면서 예쁘게 눈웃음친다. "이도진.....넌 부끄럽지도 않냐?" "닥쳐..." 흥분한 지후의 페니스를 부드럽게 애무하다가 한번에 내속으로 집어넣었다. 배안 한가득 차오는 녀석의 것을 느끼며 허리를 크게 흔들자 커다란 불기둥이 내 뱃속에서 요동친다. 사랑한다....이지후......사랑해........너 때문에 정말 미쳐버리겠다. 황홀하고 자극적인 쾌락의 행위 끝에 마침내 내 몸속으로 지후의 씨가 뿌려지며 뱃속 가득 따뜻하게 퍼진다. 끝없는 갈증 끝에 나타난 오아시스처럼 나는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정신없이 너를 빨아들인다. 지후의 심장소리를 들으며 나른하게 누워있는데 감미로운 낮은 허스키가 내게 속삭인다. "이도진......그렇게 불안해하지 마라." 내 머리카락을 만지는 손길이 부드럽다. 두근.두근. 규칙적으로 뛰는 심장소리에 왠지 모르게 안심이 되며 살며시 잠이 온다. "너 같이 섹시하고 야한 놈한테 안 빠지는 놈이 어딨겠냐?" "하여간.....아무 흥미 없다는 얼굴을 한 주제에 야한 짓은 혼자 다하고....." 그래서 싫어? "흠.......이럴 줄 알았으면 다이아 박힌 반지 사올 걸......." 크큭큭......잘도 그러겠다. 규칙적인 심장소리와 머리카락을 만지는 부드러운 손길에 참을 수 없이 눈꺼풀이 무거워진다. 좀 더 네 목소리를 듣고 싶은데.......너무 졸려........ "생일 축하한다......도진아." "자냐?" 아래를 내려다보자 도진은 새근거리는 숨소리를 내며 천사같이 잠들어 있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살포시 웃음 짓던 지후는 살짝 고개를 숙여 도진의 정수리에 키스하며 잠든 도진의 귓가에 속삭인다. "...................사랑해....." The Wedding March..<외전 2> "어떻해....지후야....나 너무 떨려..." 하얀 웨딩드레스를 입은 누나는 정말 눈부시게 아름답다. 저런 모습을 보니 정말 다른 남자에게 넘겨주고 싶지 않군.... 누나의 결혼 상대는 31살의 잘나가는 벤처 기업의 사장인데 남자인 내가 볼 때도 상당히 잘생기고 멋진 사람이다. 그 사람 옆에서 행복한 얼굴을 하는 누나를 보면 행복함과 동시에 서운함을 느낀다. "괜찮아 누나....잘 할꺼야.....난 그만 나가 볼께." 신부 대기실에서 나오자 삼촌 혼자 손님을 상대하느라 진땀을 빼고 있다. "지후야. 어디 갔다 왔니? 빨리 이리 와서 접객해라." "네..." 얼굴도 모르는 사람에게 인사를 하고 악수를 하느라 머리에 쥐가 다 난다. 아무래도 사람들 상대하는 건 쥐약인데...누나 결혼식만 아니라면 당장 도망가고 싶다. "네 엄마한테는 알렸니?" "아뇨....누나가 싫어해서요...." "그래.... 지연이 입장에서 보면 쉽게 용서할 수 없겠지...........그래도 결혼식인데 양부모 자리가 다 비어 있는 건 보기 안 좋구나." "................" 허울뿐인 부모라도 이런 때엔 자신의 존재감을 자식에게 확실히 각인 시킨다. 갑자기 담배가 피고 싶군. 흡연의 욕구를 간신히 억누르며 정신없이 손님을 받고 있는데 한쪽 구석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소리의 근원지를 쳐다보자 깔끔한 정장을 입은 도진이 벽에 기대어 담배를 피면서 내 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뭐야....너였냐.... 심플한 회색 정장이 호리호리한 몸에 착 감겨서 몸의 라인을 그대로 드러내고 담배연기를 뱉어내는 빨간 입술이 무표정한 얼굴과 대비되어 한층 유혹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대낮부터 엄청 꼴리게 하는군...." 주위의 여자들이 녀석을 쳐다보며 수군거린다. 하여간 보는 눈들은 있어가지고....저 죽이게 섹시한 놈이 내 애인이라고 말하고 싶어서 입이 근질거린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도진이 녀석이 내 쪽으로 천천히 걸어온다. "왔으면 말을 할 것이지 왜 구석에 처박혀 있냐?" "바빠 보여서..." 녀석은 그렇게 말하고는 삼촌에게 예의 바르게 인사한 후 내 옆에 와서 선다. 어떻게 끝났는지 기억 전혀 안나지만 어쨌든 결혼식이 끝나고 누나와 매형이 공항으로 떠나자 전신의 힘이 한꺼번에 빠진다. 이래서 사람들 사이에서 부대끼는 건 질색이다. 하루 종일 목을 조르고 있던 넥타이를 느슨하게 하고 소파에 몸을 묻자 온몸이 나른하게 늘어진다. 역시 집이 최고군.... 몸이 편안해지니 결혼식 내내 마냥 행복하게 웃던 누나의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린다. "우리 누나 정말 행복해 보이더라...." "결혼이란 건 원래 그렇게 사람을 행복하게 만드는 건가?" ".....글....쎄......." "나도 너랑 결혼하고 싶다. 도진아..." "..............." "물론 네가 웨딩드레스를 입어 줬을 때의 얘기지만...." 정성껏 우려낸 쟈스민 티를 한 모금 마시자 오늘 하루 종일 모르는 인간들에게 치이느라 쌓였던 피로가 풀리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 말.......진심이냐...." "어....." 뜨거운 차에 혀가 데지 않도록 입으로 호호 불자 그 속에 떠 있던 꽃봉오리도 파르르 떤다. 그렇게 천천히 식히면서 홀짝거리고 있는데 녀석이 차를 마시다 말고 넥타이를 풀어서 던져버리더니 하얀 셔츠의 단추를 풀기 시작한다. 녀석의 행동에 의아함을 느끼며 계속 쳐다보고 있는데 도진은 셔츠를 벗어서 바닥에 떨어뜨리더니 정장 바지까지 벗어버린다. 갑작스런 스트립쇼에 놀라긴 했지만 매끈하고 탄력 있는 녀석의 몸을 즐겁게 감상하고 있는데 알몸이 된 도진이 부스럭거리며 종이 가방에서 하야 웨딩드레스를 꺼낸다. 설마.... "야....이도진....네 놈이 아무리 호리호리하다고 해도 누나 옷이 들어갈 리...." 등의 지퍼가 반밖에 안 올라가고 길이가 짧아 발목이 다 드러나긴 했지만 누나의 드레스는 전체적으로 도진의 몸에 맞았다. 허리가 가는 건 알고 있었지만 설마 이정도 일 줄이야.... 드레스를 다 입은 도진은 도발적인 적갈색 눈동자로 나를 내려다보며 말한다. ".....이제 나와 결혼 할꺼냐.....이지후...." 맨발에 흰 발목은 훤히 드러나고 한쪽 어깨 끈이 어깨에 흘러내리고 있었지만 화려한 웨딩드레스를 입은 녀석의 모습은 정말 미치도록 매혹적이었다. 한 발자국, 한 발자국, 녀석에게 다가가 종이 가방 속에 있던 하얀 베일을 꺼내어 머리에 씌워주며 말했다. "물론이지....너.....정말 최고다." "정말...........돌아버리게 예쁘다. 이도진." 하얀 베일 밑으로 도진의 적갈색 눈동자와 빨간 입술이 도드라져 보인다. 나는 마치 최면에 걸린 듯 새하얀 베일위로 녀석의 입술을 살포시 만지며 말했다. "사랑한다......평생 내 옆에 있어라..." 대답대신 도진은 희미하게 웃어 온다. "................" "근데....반지도 증인도 없는데.....어쩌냐?" 도진은 잠시 생각하더니 리모컨을 들어 TV를 켜자 9시 뉴스 화면이 뜬다. 아....엄기영 아저씨네......벌써 9신가...... "저 사람이 증인이다." 뭐? 그건 좀 무리가...... "주례하고 반지교환은 생략이다. 맹세의 말은?" 너는 무슨 결혼을 번갯불에 콩 볶아 먹듯이 하냐? 녀석과의 로맨틱하고 화려한 결혼식을 생각하고 있었던 나였기에 의외의 전개가 못 마땅 스러웠지만 드레스 차림의 코피 나오도록 섹시한 도진을 거부 할 수 없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 이지후는...." "이도진을 반려로 맞아" "평생을 아끼고 사랑할 것을 맹세합니다." 경건한 마음으로 맹세를 하고 도진을 쳐다보았다. 베일 속의 표정을 읽을 순 없지만 녀석도 나와 같은 가슴 벅찬 감동을 느끼고 있을 것임에 분명하다. 나의 맹세의 말에 잠시 동안 아무런 미동 없이 나를 쳐다보기만 하던 녀석이 조용한 어조로 말한다. "나 이도진은......" "이지후를 반려로 맞아...." "평생을 아끼고 사랑하겠습니다." 맹세의 말은 입에서 흘러나와 서로의 심장을 속박한다. 키스를 하려고 베일을 들어 돌리자 나를 똑바로 쳐다보는 강한 눈동자와 마주친다. 강하고 아름답고, 올곧은 눈동자.... 이렇게 매력적인 놈을 가질 수 있게 해준 내 운명에 감사한다. 살짝 입술을 겹치자 마치 첫 키스를 하는 것처럼 가슴이 두근거린다. 매끄러운 목과 쇄골을 애무하면서 녀석을 소파위에 앉히고 드레스 안으로 손을 넣어 긴다리를 더듬었다. "이도진........나 지금 널 보는 것만으로 가버릴 것 같다." 도진은 살짝 입꼬리를 올리더니 내 손을 잡아 허벅지 안쪽으로 이끌며 말한다. "나야 상관없지만...옷 더럽히면 지연이 누나한테 혼난다." 그...그렇겠지... 슬픈 현실에 한숨을 쉬며 애무하던 손길을 멈추고 콘돔을 찾기 시작했다. 여기에 놓아둔 게 하나 있을 텐데.... "뭐하는 거냐?" 애무를 멈춘 것에 기분이 나빴는지 녀석이 인상을 찌푸리며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한다. "콘돔.....이 근처에 나두지 않았냐?" "............." "감도 떨어지니까 그냥 해." 저런 말을 얼굴 하나 붉히지 않고 말하다니...새삼 두꺼운 녀석의 얼굴 가죽이 감탄스럽다. "대신 빨래는 네가 해라." 그렇게 말하면서 녀석은 도진은 나를 소파에 끌어당겨 넘어뜨리곤 내 위로 올라온다. "맥주 마실래?" 소파위에 노곤하게 늘어져 있는 도진에게 맥주를 내밀자 나른한 얼굴로 받아든다. 질퍽한 정사 뒤의 맥주는 목구멍을 싸하게 자극하며 시원하게 몸속으로 퍼진다. "난 좀더 정식으로 하고 싶었다." "그랬냐......" 도진이는 피식거리면서 캔뚜껑을 따고는 맥주를 들이킨다. 아무래도 좋다는 녀석에 비해 이런데 연연해하는 내 자신이 계집애처럼 느껴진다. 아무래도 떨쳐 낼 수 없는 미련에 불만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는데 도진이 가까이 다가와 앉더니 내 볼에 키스하며 말한다. "난....너만 있으면 돼......다른건 아무래도 상관없다...." "주례가 없어도......." "증인이 9시 뉴스 앵커라도......." "반지 교환 없이 우리 둘이서만 하는 맹세라도.........." "네가 나를 영원히 속박해 주기만 있다면 난 그걸로 만족한다." 네 놈이 이렇게 까지 말 길게 하는 거 처음 본다. 평소엔 무심한 놈이 갑자기 그렇게 멋진 말 하는 건 반칙 아니냐? 심장이 터지려고 그런다. 임마. "나도......그렇긴 하지만......그래도 돈 벌면 정식으로 다시하자." 끝내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말하자 도진은 무심한 얼굴로 그러던지...하고 말한다. 긍정적인 대답에 희망을 가지고 당장 아르바이트를 늘리든가 해서 결혼 자금을 모을 궁리를 하는데 갑자기 도진이 뜬금없는 소리를 툭 내던진다. "대신.....그 때 드레스는 네가 입어라." 녀석의 황당한 말에 기가차서 말도 안되는 소리하지마라고 말하려는 순간 도진이 놈은 아예 한 술 더 떠서 말한다. "그거 입으면.....공주님 안기도 해줄께...." "씨발....누가 그런 거 해 달래? 그리고 드레스를 내가 왜 입어?" "나한테 그런 게 어울리기나 할 것 같냐?" ".....하기 싫음 말던지....." 그렇게 샐쭉하게 내뱉곤 도진은 방으로 들어가 버린다. "이도진.....그건 좀 너무하잖아...." 문을 두드리며 소리쳐 보지만 방 안에서는 아무런 응답이 없다. "난 정말 그거 입기 싫다고.........나 좀 봐주면 안되냐?" 시간이 지날수록 방을 향해 소리치는 지후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져 간다. 한참 후 결국 포기한 듯 지후가 한숨을 쉬면서 뭔가를 조그맣게 중얼거리자 방문이 열리며 활짝 웃음 짓는 도진의 모습이 보인다. 그들의 뒤로 방문이 닫히며 거실에는 정적이 흐른다. 마구 어지럽혀져 있는 하얀 소파와....쿠션......맥주 캔 두개.....그리고 웨딩드레스... 켜져 있는 TV에선 월화 드라마가 흐르고 있고 소파 앞에 놓여져 있는 작은 탁자 위에는 만개한 쟈스민의 꽃봉오리가 동동 떠다니는 식어버린 쟈스민 티 두 잔이 아직도 희미한 향기를 피어내고 있다. ♥우정 세탁소♥ "하여간,,,,,요즘 젊은 새끼들은 부끄러운 줄 모른다니깐....쯧.쯧." "와 그라는데? 뭔 일 있소?" 혀를 차대던 대머리 중년 아저씨가 웨딩드레스의 얼룩을 아줌마에게 보이며 말한다. "이것 좀 봐봐라....이게 뭘 로 보이노? 여기 저기 아주 떡칠을 해 놨다." 얼룩을 유심히 바라보던 아줌마는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묻는다. "이거.....어데서 맏긴 건데?" "그런 건 알아서 뭐 할라고,,,,,,얼굴은 아주 멀쩡하게 생겼드만 부끄러운 줄 모르고 어데 이런 걸 떡하니 맏기노? 말세다. 말세야...." 대머리 아저씨가 투덜거리면서 약품을 묻혀 드레스의 얼룩을 지우기 시작하자 아줌마는 아저씨 등 뒤에 서서 들으라는 듯 중얼거린다. "나는 그래도 그 여자가 쪼매 부릅네..." "니 지금 뭐라켔노? 이 여편네가 미칬나? 으응?" "하이고.....눈 부릅뜨면 누가 무습다 카드나?" 아줌마는 그렇게 천연덕스럽게 말하고는 방으로 들어가 버린다. "니....거 딱 서라.....안서나?" 웨딩드레스를 빨던 아저씨가 얼굴을 시뻘겋게 붉히며 혼자서 발악을 해대지만 그를 신경 쓰는 이 아무도 없다. 지후가 단순히 빨기 귀찮다는 이유로 맏겨 버린 웨딩드레스는 평안하던 우정세탁소에 커다란 평지풍파를 일으키고 있었다. -完- [퍼옴/타쿠] 냉정과 열정사이(쟈스민티 외전) 上 열정과 냉정 사이 Red.......열정 소년의 열정은 모든 것을 불태우는 정염(情炎)의 불꽃이다. 봄인데도 정말 오늘은 정말 찔 듯이 덥다. 어제 까지만 해도 꽃샘추위에 얼굴을 에이는 것 같더니....나날이 지구가 미쳐가는 것 같다. 점심시간의 종이치자 재빨리 책을 덮고 가방에 들어있던 도시락 2개를 꺼내서 옥상으로 올라갔다. 교육의 질 향상이다 뭐다 하면서 왜 학교에 에어컨은 안 달아주는지...그나마 학교에서 가장 높은 옥상에 올라가면 선선한 바람이 불기 때문에 점심시간이면 언제나 그 곳을 애용한다. 물론 그 녀석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끼이익~하고 듣기 싫은 소리를 내는 옥상문을 열자 아직 아무도 올라와 있지 않다. 강렬하게 내려쬐는 태양빛에 가끔씩 불어오는 후덥지근한 실바람을 느끼며 담벼락에 기대어 담배 한 개피를 다 태우고 나서야 문을 열고 녀석이 나타난다. 조이현....내가 한눈에 반한 놈..... 녀석은 언제나와 같이 무표정한 얼굴로 느릿느릿 걸어오더니 내 옆에 앉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내 옆에 앉은 것이 아니라 늘 앉는 곳에 앉은 것뿐이겠지. "먹어라." 준비해온 도시락을 내밀자 녀석은 언제나 처럼 내민 도시락의 뚜껑을 열고 기계적으로 먹기 시작한다. 아침잠을 설쳐가며 만든 장조림이랑 계란말이 김치볶음밥이 녀석의 입으로 들어가자 왠지 모르게 뿌듯하다. 녀석이 먹는 것을 흐뭇하게 바라보며 나도 도시락을 열어 먹기 시작했다. 내가 만들었지만 정말 너무 맛있군. 이렇게 맛있는데 넌 어째 칭찬 한마디 없냐? 뭐....애초에 반응을 기대했던 건 아니었지만...... 일단은 나도 인간이다 보니 가끔은 이 녀석의 지독한 무심함과 무표정이 서운해진다. 내가 좋아서 하는 짓이긴 하지만 역시 인간관계는 give and take를 토대로 하여 이루어지는 것. 일방적인 관계는 사람을 쉽게 질리게 한다. 하긴.....누굴 원망하냐? 이런 놈한테 반한 내가 미친놈이지...... 조그맣게 한숨을 내쉬자 이현이 나를 흘낏 쳐다보더니 다시 무표정한 표정으로 밥을 먹는다. 어쩌면 이 녀석의 이런 무심한 태도가 나를 더욱 끌어들이는 지도 모르겠다. 지금까지 난 나의 감정과는 상관없이 어쨌든 주위로부터 사랑받는 인간형이었다. 하지만 난 나에게 호감들 보인 사람들에게 마치 지금의 녀석과 같이 무관심과 무표정으로 일관했고 그들은 자기들이 다정한 태도에 반응을 보이지 않는 내게 배신감을 느껴서 날 미워하게 되거나 혹은 나를 무시하곤 했다. 그들이 어느 쪽을 택하건 나에겐 조금도 의미 없는 일이었고 오히려 그것으로 그들이 나를 귀찮게 하는 일이 없어졌기 때문에 나는 나름대로 만족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들의 모습이 내 모습에 투영되어 보인다. 마음대로 기대하고 귀찮게 만드는 의미 없는 군중들..... 내가 그렇게 생각했었던 것처럼 녀석이 나를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까 두렵다. 그들처럼 멋대로 기대하고 실망하지 말자고 언제나 다짐하지만 막상 이렇게 나에게 무심한 녀석을 보면 나 역시 심장이 따끔따끔 아프다. 이런 걸 임자 만났다고 하는 건가? 정말 딱 걸려 버렸다. CD플레이어의 이어폰을 귀에 꽂고 눈을 감자 허스키한 보컬의 목소리가 심란한 내 마음을 위로해 주는 듯 하다. それぞれの步む道が今一つになる今日という始まりに 저마다 걸어갈 길이 지금 하나가 되네 오늘이라는 시작으로 あなたを守るその爲に今僕が出來る飾らない約束を 당신을 지킨다는 그것만을 위해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꾸밈없는 약속을 この氣持ちを愛と呼んで Let's get together 이 마음을 사랑 이라하고 Let's get together 이 사람 목소리 정말 좋구나. 한참 그렇게 음악에 취해 있는데 눈가를 더듬는 손길이 느껴져서 눈을 뜨자 이현이 내 눈가에 있는 점을 만지고 있다. 마치 신기한 것을 보는 것처럼 표정 없는 옅은 갈색 눈동자에는 희미하긴 하지만 감정의 파편이 들어있다. 순간 느껴지는 심장의 두근거림.... 차가울 거라고 생각했던 녀석의 손가락은 따뜻한 체온을 품은 채 내 눈가를 나른한 손길로 더듬는다. 서로의 눈동자를 바라보는 우리 둘 사이를 습기를 잔뜩 머금은 바람이 가르고 지나가자 그와 함께 내 얼굴에서 따뜻했던 손길도 떨어져 나갔다. 망할 바람 같으니라고,,,,,평소엔 불지도 않더니 이런 중요한 때 불고 지랄이야....... 거둬들이는 녀석의 하얀 손을 다시 붙잡지 않기 위해 초인적인 인내력을 발휘하면서 다시 만져 달라는 열렬한 눈빛으로 바라보자 이현이 녀석은 마치 흥미 잃은 장난감을 보는 듯한 눈으로 쳐다보더니 휙하고 고개를 돌린다. 젠장~너무 느끼했나. 모처럼 나에게 관심을 보여줬는데 이렇게 망쳐버리다니.....아깝다. 나에게 흥미를 잃어버린 녀석을 씁쓸하게 바라보다 이어폰의 볼륨을 높이자 탁하면서도 매력적인 목소리가 귓속으로 파고들어온다. 언제쯤이면 녀석의 안쪽에 닿을 수 있을까? 일방적으로 녀석의 그림자를 쫓아다니는 것도 슬슬 한계인 것 같다. 뭔가 이질적인 존재감이 느껴져 쳐다보자 이소희가 싹싹한 얼굴로 이현과 얘기하고 있다. 나와 있을 때와는 달리 이현이 입가에 희미한 미소까지 지으며 이소희의 말을 경청하고 있는 것을 보자 속이 부글부글 끓어오른다. 씨바.....어릴때부터 친구면 다냐? 나 따위는 결코 끼어들 수 없다고 말하는 듯한 분위기에 열이 뻗쳐 거칠게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자다가 갑자기 어디가냐....서준현." 자긴 누가 잤다고 그러냐...이소희. 아무렇지도 않게 이현이 어깨에 걸친 그 팔이나 치우지 그래? 확 분질러 버리기 전에....... 유치한 질투에 눈에 힘을 주고 녀석을 찌릿하고 노려봐준 후 옥상문을 부서질 정도로 쾅하고 닫고 계단을 내려왔다. 쓸데없는 화풀이.... 내가 언제부터 이렇게 옹졸한 인간이었는지 모르겠다. 소희놈과 함께 있을 때마다 느껴지는 패배감이 나날이 나를 좀먹어 간다. "싸가지 없는 새끼.....또 뭐에 열 받아서 저러냐?" "글쎄......" "근데....볼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저 자식 힙라인 정말 끝내준다." "................" "죽이는 엉덩이에다....." "야한 눈물점..........표정은 뭐같이 싸가지 없고......." "저렇게 키 안 컸으면 저 놈 벌써 옛날에 변태새끼들한테 따먹혔을걸......안그러냐. 조이현." ".............." "............." "알았어.....입 닫으면 되잖아......눈깔은 왜 부라리고 난리냐?" "그럴거면 그만 받아주면 되잖아.....맘에 들면서 괜히 튕기기는......." 나를 죽일 듯이 노려보는 이현이 녀석에게 들으라는 듯 조금 큰 소리로 궁시렁거리며 발로 땅바닥을 툭툭 치고 있는데 구석 쪽에 먹다만 도시락 하나와 아마도 이현이 녀석이 먹어치운 듯이 보이는 깨끗하게 비워진 도시락 통이 아무렇게나 놓여 있는 게 보인다. 서준현 그 싸가지 없는 새끼가 매일 도시락까지 싸다 바치다니....... 정말 세상은 오래살고 볼일이다. 그래도 나 같은 일방통행에서 보면 서로 끌리는 네 놈들이 너무 부럽다. 네가 뭘 생각하고 있는지 대충 짐작은 가지만 왠만 하면 그 놈 그냥 받아주지 그러냐? 한사람만 죽도록 바라 본다는거.....그거 얼마나 가슴 저미고 힘든 일인지 아냐? 끝없이 기대하고..... 끝없이 절망하고...... 그러면서 다시 기대해버리는 바보 같은 감정. 상처가 하나 둘 쌓여갈 때마다 울컥하고 가슴가득 치밀어 오는 감정에 질식해버릴 것 같은 느낌을 안다면 그렇게 무심한 얼굴로 녀석을 애태울 수 없을 거다. #설레임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타인에게 별 관심이 없는 철저히 개인주의로 무장된 인간이다. 내 주변에 있는 놈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건 그건 내 관심 밖의 영역이고 어차피 나에게 티끌만큼의 존재감도 없는 녀석들이기 때문에 모든 것이 내겐 무의미했다. 그런데 그렇게 뭔가에 집착하는 것도, 포기하는 것도 없이 순탄하게 살아온 내 인생이 조이현과 얽히면서 틀어지기 시작했고 그 녀석은 마치 강력한 자석처럼 굉장한 인력으로 나를 자신에게 끌어들였다. 1학년 여름 방학이 끝나고 곧 다가오는 중간고사 시험공부를 위해 책에 집중하고 있는데 언제나 그렇듯이 몇 놈들이 한쪽에서 포르노 잡지를 돌려보며 떠들어댄다. 씨발.....시끄러워 죽겠네....반장은 저런놈들 조용히 안 시키고 뭐하는 거야? 점점 더 소란스러워지는 저질 집단에 의해 내 신경은 칼날처럼 곤두섰고 목마른 사람이 우물판다고 결국 나는 게으르고 책임감 없는 반장을 대신해서 녀석들 쪽으로 다가가야 했다. 어떻게 저렇게 하나같이 떡판이람.... 녀석들의 여드름투성이의 얼굴을 보고 포르노 잡지를 보며 욕망을 다스릴 수밖에 없는 처지를 동정하긴 했지만 나는 시끄러운 게 싫다. "왜....너도 관심있냐? 서준현." "하긴 너같은 녀석이 더 밝히긴 하지.....취향이 뭐냐? 글래머? 청순? 아니면 귀여.." 놀고 있네.....나 같은 놈이 어떤 놈인데? "시끄러우니까 닥치고들 봐라......." 곱게 말하고 싶었지만 이미 내 입밖으로 튀어나간 말을 주어 담을 수 없다. 잠시 동안의 침묵 끝에 녀석들이 얼굴을 잔뜩 찌푸리며 나를 향해 온갖 더러운 욕을 해댄다. 귀가 썩어버릴 것 같군...... 어차피 개개인으로 덤비지 못하는 주제에 집단의 힘을 믿는 나약하고 비굴한 족속들은 당장이라도 나를 잡아먹을 듯이 위협했다. 일이 커질 것 같은 예감에 한숨을 쉬며 이 사태를 어떻게 수습할 것인가 나름대로 머리를 굴리고 있는데 난데없이 건조하고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시끄러." 낯선 목소리에 교실은 순식간에 조용해지며 모두 동시에 고개를 숙인다. 누구지? 목소리가 나는 쪽으로 돌아보자 왠 야리한 녀석이 잠에 취한 얼굴을 하고 내 쪽을 쳐다보고 있다. 저 놈이 누군데 이렇게 조용해지는 거지? 포르노 집단은 순식간에 잡지를 서랍속에 처넣고는 쥐죽인 듯 책상만 바라본다. 이 반응을 보아하니 저 녀석 일진 정도 되는 모양이군.... 남자 고등학교에서는 공부 잘하는 녀석, 운동 잘하는 녀석이 아닌 싸움 잘하는 녀석이 최고의 지위를 누린다. 힘이 지배하는 단순 무식한 사회를 경멸하긴 하지만.... 어쩌겠는가? 나도 일단 별 수 남고딩 인것을.... 뭐 어찌 되었든 꽤 시끄러워질 거라고 생각했던 일이 간단히 해결되어서 다행이다. 개똥도 약에 쓴다더니...... 유치한 싸움이나 해대는 일진 녀석도 가끔은 사회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하는구나. 녀석에게 약간의 고마움을 느끼며 난 자리로 돌아와 다시 책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오늘 따라 공부가 잘 되네....평소보다 많이 나간 진도를 보며 흐뭇하게 웃으면서 가방을 싸서 집에 가려는데 일진으로 추정되는 녀석은 아직까지 책상에 얼굴을 묻은 채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래도 내 대신 조용히 시켜줬는데 깨워줄까? 정말 아주 오랜만에 좋은 일하는 셈 치고 녀석을 깨우기 위해 살짝 어깨를 흔드는 순간 갑자기 배에 강한 통증이 느껴지며 몸이 멋대로 바닥을 나뒹군다. 갑작스런 복통에 도무지 숨을 쉴 수 없다. 배를 감싸 쥐며 어떻게든 고통을 줄여보려고 하고 있는데 그 사이에 내게 다가온 녀석이 내 머리카락을 감싸 쥐며 목을 뒤로 젖혀 자신을 올려다보게 했다. 그리고 처음으로 그 눈동자와 마주쳤다. 나와 닮아 있는 감정이 들어있지 않은 옅은 갈색 눈동자. 아니.....닮아있긴 하지만 나와는 근본적으로 다른.....아무것도 비추지 않는 멍한 눈. 투명한 갈색 눈동자에 기묘한 동질감과 이질감을 동시에 느끼면서 무의식적으로 손을 뻗어 녀석의 얼굴을 만졌다. 손가락에 닿는 피부의 느낌이 생각 이상으로 부드럽다. 녀석은 갑작스러운 나의 행동에 놀랐는지 약간 눈을 크게 뜨긴 했지만 고요한 정적이 흐르는 가운데 무언가를 관찰하는 것 같은 눈으로 나를 내려다볼 뿐 내 손을 쳐내지는 않았다. "너 이름이 뭐냐?" "............" 내 물음에 녀석은 잠시 동안 침묵을 치킨 후에 듣기 좋은 낮은 목소리로 얘기한다. "....조이현..." "난 서준현이다." "................" "머리카락을 죄다 뽑아놓을 생각이 아니라면 그만 놓아주면 좋겠는데.....조이현......머리가 다 지끈거린다." 머리카락을 휘감고 있던 손이 떨어져 나가자 얼얼함이 느껴짐과 동시에 두피가 혈액순환을 시작하는지 머리에 열이 오른다. 녀석을 올려다보며 옷을 탈탈 털고 바닥에서 일어나는데 맞은 복부가 찡하게 아파왔다. 인상을 찌푸리며 바닥에 떨어진 크로스 백을 어깨에 메고 녀석을 쳐다보자 조이현은 어느새 가방을 다 챙겨서 책상에 걸터앉아 있다. 혹시 누굴 기다렸던 중이었나? 아무리 쓸데없는 참견이었다고 해도 갑자기 때리는 건 좀 너무하다고 생각하는데.... 그렇게 생각하며 녀석을 쳐다보자 조이현도 내 시선을 피하지 않고 똑바로 쳐다본다. 양아치 새끼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투명하면서도 멍한 갈색 눈동자가 왠지 맘에 든다. 별로 긍정적인 상황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녀석에게 호감이라는 것을 느끼는 내 자신이 조금 당황스럽기도 하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저 예쁜 눈동자에게 호감을 느낀 것이지만..... 고개를 갸웃거리며 교실에서 나오자 조이현도 곧 내 뒤를 따라 나왔다. "누구 기다리고 있었던 거 아냐?" "............" "..........." "......별....로....." 혹시 고향이 충청도냐? 대답 한번 듣기 되게 힘드네.... 말없이 내 뒤를 묵묵히 걷는 녀석이 왠지 나랑 같이 가겠다는 녀석의 말없는 의사표시로 느껴져 이상하게도 기분이 좋아졌다. 서로의 발자국소리만 들릴 뿐 어두운 하교 길에 녀석과 나는 말이 없다. 처음 본 사인데 특별히 할 말이 있어야지.....아 한반이니까 처음 본 사이는 아닌가? 뭐 나도 그렇게 사교적인 녀석은 아니고 녀석도 그런 건 분명히 마찬가지 일테니 이 말없는 침묵의 하교길은 아무래도 가는 길이 달라질 때 까지 계속될 것 같다. 나란히 걸어가는 동안 나는 조이현의 낮고 기분 좋았던 목소리를 한번 더 듣고 싶어서 상황적으로 자연스러워 보이는 질문들을 머릿속에서 열심히 생각해 내고 있었다. 혈액형을 물어볼까. 아님 취미? 두개 다 너무나 뻔해서 묻기가 민망해 지는군....역시 그만둘까? "혈액형이 뭐냐?" 이런....어느새 목소리가 멋대로 입술을 비집고 나가고 있다. 나의 갑작스럽고도 부자연스러운 질문에 이현은 아무런 말도 없이 나를 그냥 물끄러미 쳐다본다. "................." "................" 한참을 기다려도 대답이 없다. 설마 나 지금 씹힌 건가? 왠지 상당히 쪽팔린다. 얼굴이 뜨거워져서 녀석의 대답을 포기하고 고개를 돌리는데 등 뒤에서 조그맣게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A형......아마도....." 씨발....대답 듣다가 숨 넘어 가겠다. "그래? 왠지 그럴 것 같았어." 별 뜻 없이 하도 할말이 없어서 아무렇게나 나오는 대로 말해버렸다. 왜 보통 그러지 않는가? 누가 무슨 형이라고 말하면 왠지 그럴 것 같다고 가볍게 맞장구치는 거...그리고 그 다음에는 보통..... "왜 그렇게....생각...." 그래 이거다. 왜 그렇게 생각하느냐고 반문하는 거.....근데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그냥 아무말없이 그냥 있기엔 뻘쭘해서 내뱉은 말인데. 역시 사람은 말하기 전에 생각이란 걸 해야 하는 거다. "그냥......." "좀.....소심해 보여서..." 젠장.....오늘따라 내 입이 왜이러냐? 상대는 저렇게 야리해 보여도 반 애들이 쪼는 양아치라고, 아까 같이 상당한 펀치를 먹일 것에 대비해서 나는 녀석이 눈치 채지 못하게 배에 힘을 주었다. 그러나 조이현은 내 대답에 한쪽 눈썹을 약간 들어 올리더니 곧 무표정한 얼굴을 하며 별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다행이다.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모양이군. "취미가 뭐냐?" 참고로 내가 물은 게 아니다. 이 녀석 생각하는 수준이 나랑 거의 비슷하군....조금 기쁘다. "굳이 취미라고 할 거는 없고.......잠자는 걸 좋아하긴 하지." "................." "......나도다." "................." 아무래도 이 녀석과는 대화라는 게 형성되기 힘들 것 같다. 그 질문과 답변 후로 우리는 1m 정도의 거리를 유지하며 침묵을 지키며 걷기만 했고 갈림길이 나오자 녀석은 아주 자연스럽게 내게 아무런 인사 없이 가버렸다. 순간 같이 걸어 온 것이 아니라 단순히 녀석이 가는 길에 내가 옆에 있었던 것뿐이었던 같은 기분이 강하게 들었다. 이상하고 지나치게 짧은 대화이긴 했지만 그래도 우리사이에 뭔가가 존재하고 있었다고 생각했었는데......내 착각이었나. 기분이 이상하다. 응,,,,,,정확히 말하면 약간 기분이 나쁘다. 내 맘대로 착각한 것뿐인데도 약간 서운한 것 같다. 오늘 처음 본 놈인데......설마 나 녀석이 마음에 든건가? 녀석과 함께 말없이 걸어온 길을 돌아보자 왠지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간다. 유대감.....그리고 알 수 없는 연결고리. 약간의 미련과 10분전 과거에 대한 그리움. 함께 걸어왔던 느낌이 되살아나자 가슴 부근이 간질간질 거리며 이현에게 맞은 복부로부터 희미한 열기가 올라온다. 그리고 정체를 알 수없는 그 열기는 순식간에 전신으로 화악 퍼지더니 온몸을 뜨겁게 달구며 내 속에 무언가를 들뜨게 했다. 두근. 두근. 그 열기와 함께 찾아온 조그만 설레임..... 그 때부터 시작된 내 미열은 내릴 생각을 하지 않고 지금까지 계속 나를 괴롭힌다. #열병 에전엔 내가 이렇게나 적극적인 인간인지 미처 몰랐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나의 숨겨져 있는 이타성에 놀라버렸다. 초등학교 때 지하철에서 구걸하는 걸인을 보면 능력 없는 사람이라고 조소하며 끝까지 주머니에 있던 백원을 내 놓지 않던 나였다. 어디 그 뿐인가? 앵벌이 하는 내 또래의 아이들을 보면서 안타까움을 느끼면서도 그들 뒤에 있는 조직 폭력배에게 좋은 일 하기 싫어 역시 오백원짜리 동전을 꼭 쥔 채 냉정하게 지나치던 나였다. 어릴때부터 그런 성격이었기 때문에 머리털 나고 지금까지 남을 위해 뭔가를 해 본 기억이 내게는 전혀 없다. 언제나 누군가가 나에게 베풀어주는 것에 익숙해서 그냥 받기만 할 뿐 그럴 필요도 그럴 마음도 전혀 들지 않았었다. 그랬던 내가.... 조이현 녀석이 내 마음에 들어버린 후 녀석에게 잘 보이기 위해 매일 아침 이렇게 일찍 일어나 도시락을 싸고 있다. 비엔나 햄에 문어 모양으로 칼집을 넣어서 살짝 굽고 파와 당근을 잘게 썰어 달걀말이를 해놓은 뒤 마지막으로 김치를 달달 볶아서 검을 깨를 뿌렸다. 정말 지극정성이다. 서준현.... 어차피 그 녀석은 무표정한 얼굴로 먹을 게 분명한데, 뭐냐....이 계집애 틱한 도시락은... 그렇게 한숨쉬면서도 하얀 쌀밥위에 완두콩으로 장식하는 나. 내가 봐도 한심하다. 주위에 눈을 돌리면 신기한 것들이 참 많은 것을 알게 된다. 조이현에게 관심을 가진 후 녀석의 주위를 세심하게 살피던 중 흥미로운 생물체가 내 눈에 들어왔다. 우연수라고 하는 옆 반 놈인데 이 놈도 나처럼 조이현에게 홀딱 반한 모양인지 매 쉬는 시간 마다 우리 반까지 찾아와선 이현이 옆에 딱 붙어서 조잘거리다가 종이 치면 무지 끈끈한 눈동자로 몇 번이나 뒤돌아보며 자신의 반으로 사라져가곤 했다. 저놈은 조이현이 무섭지 않은 모양이지? 다른 놈들은 녀석이 일진이라는 이유만으로 설설 기던데..... 우연수에 대해 부연 설명하자면 얼굴은 평범하게 생겼는데 선이 가늘어서 그런지 언뜻 보면 여성스러운 느낌이 들고 키는 160cm가 간신히 넘는 정도에다 바람이 불면 픽 하고 날아갈 정도로 말라 빠져서 한눈에 보기에도 부실, 그 자체다. 물론 여기까지는 그래도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인간형이다. 이놈의 특이한 점은 바로 앵앵거리는 콧소리와 베베 꼬아대는 몸인데 이현에게 매미처럼 딱 달라붙어서 꽈배기처럼 몸을 꼬아대는 걸 보면 정말 저 놈이 사내새끼가 맞나 싶다. 게다가 더 신기한 건 남학교라서 그런지 저 토 쏠리는 놈이 꽤 인기가 있다는 사실이다. 아무리 주변에 여자가 없다지만 저 콧소리나 내는 꽈배기한테 열광하다니...모두 집단 정신병에라도 걸린 것이 아닐까 심히 걱정스럽다. 뭐 조이현은 녀석을 마치 아스팔트에 달라붙은 껌이라도 되는 것처럼 무시하고 있지만... 녀석을 향한 이현의 극히 심드렁한 태도 때문에 요 몇 달간 연수 녀석이 내게 손톱을 세우며 상당히 고약하게 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난 지금까지 느긋하게 참아주고 있었다. 그래....지금까지는...... 체육을 끝내고 교실로 돌아와 재빨리 옷을 갈아입고 가방에서 도시락을 꺼내서 옥상으로 올라가려는데 아무리 찾아도 도시락이 보이질 않는다. 이상하다. 이게 어찌 된 거지? 아침에 분명히 넣었는데......가방을 탈탈 털면서까지 찾아보았지만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젠장...어떻게 된거야? 한참동안 도시락을 찾다가 결국 포기하고 한숨을 쉬며 빵이나 사러 가려는 순간 교실 한 구석에 놓여있던 쓰레기통에 무심코 눈이 갔다. 설마....... 이상한 예감에 쓰레기통 뚜껑을 열자 볼쌍 사납게 처박혀 있는 나의 도시락이 보인다. 정성스럽게 구운 문어 소세지와 계란말이, 하얀 쌀밥이 더러운 쓰레기 속에 파묻혀있는 걸 본 순간 손끝에서부터 찌릿찌릿한 분노가 올라온다. 오랜만에 뚜껑 열리게 하는 군. 솟구치는 분노로 온 몸이 부들부들 떨리는 것을 간신히 억누르며 시끄럽게 떠들고 있는 주번 녀석에게 다가가 조용히 물었다. "체육 시간 동안 교실에 들어온 놈 누구냐?" "....아무도 안 들어 왔었는데....?" "..............." "그럼 이건 네가 한 짓이겠군....." 녀석의 책상에 거칠게 쓰레기통을 올리자 주번 녀석은 놀란 눈을 하고는 쓰레기통 안을 들여다보더니 굳은 얼굴을 하고 필사적으로 부정하기 시작한다. "야....그거 내가 그런 거 아니야.....내가 왜 그런 짓을 하겠냐?" "교실에 너 밖에 없었다며...." "진짜 난 아니야......차라리 먹고 말지 미쳤다고 그 아까운 걸 왜 버리냐? "..............." 그것도 그렇군. 한 짓으로 봐서 나에게 상당한 원한을 가진 놈의 소행임에 틀림없다. 그렇다 해도 이렇게 비겁한 수를 쓰다니......상당히 불쾌하다. "누.구.냐." 열 받아서 돌아버릴 것 같아 마지막으로 힘주어 딱딱 끊어서 묻자 주번 녀석은 내 눈을 피하며 한참 눈알을 굴리더니 조그만 소리로 중얼거린다. "그러고 보니....화장실 갖다오는데 연수가...교실에게 나오는 걸 봤던 것 같기도." 후후후. 우.연.수.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난 스피드로 옥상으로 올라가 문을 쾅하고 열어젖히자 놀란 눈을 하고 쳐다보는 우연수와 그 옆에서 도시락을 먹고 있는 조이현의 모습이 보였다. 순간 얄미운 미소를 띄고 나를 쳐다보는 우연수 보다도 저 녀석이 갖다 주었을 것임에 틀림없는 도시락을 아무렇지도 않는 표정으로 먹고 있는 조이현에게 주체할 수 없는 배신감과 살기를 느꼈다. 투두둑......머릿속에서 이성이 날아가는 소리가 들린다. 퍽. 이현의 옆에 붙어서 가증스러운 미소를 짓고 있는 우연수의 가슴을 그대로 발로 까버리고는 벽에 처박히는 녀석의 어깨를 세게 밟아버렸다. "악!" 녀석이 고통스러운 신음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꼬꾸라진다. 아직 한참 멀었어. 우연수. 나를 뚜껑 열리게 했으니 확실히 책임지라구. 나자빠져있는 녀석에게 천천히 다가가자 녀석은 재빨리 이현의 옆으로 가서 그의 뒤로 몸을 숨겼다. 정말 끝까지 짜증나게 하는 새끼군..... "너 미쳤어? 나한테 왜 이러는 거야?" 우연수는 이현의 옷자락을 꼭 쥔 채 앙칼진 목소리로 외쳤다. 기가 차서.....너 그러고도 사내새끼냐? 재수 털리는 놈인지는 알았지만 설마 이 정도 일 줄은 몰랐다. 조이현은 그런 녀석을 힐끗 쳐다보더니 자신의 옷자락을 잡고 있는 손을 차갑게 쳐내곤 담벼락에 기대앉아 표정 없는 얼굴로 우리를 쳐다보면서 여유롭게 담배에 불을 붙인다. 상관 않겠다는 거지.... 잘했어....조이현.... 네 놈이 그 녀석을 감싸거나 했으면 나 아마 완전히 돌아 버렸을거다. 이현의 행동이 자신의 예상을 크게 빗나갔는지 연수 녀석은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을 하더니 곧 표독스러운 목소리로 쏘아붙인다. "내가 뭘 어쨌다고 이러는 거야?" 꼭 궁지에 몰린 쥐새끼 같군....그럼 날 물기 전에 완전히 밟아서 으깨 나야겠지. "........몸만 꼬아대는 줄 알았더니...성격도 상당히 꼬였더군,,,,,우연수." ".........?......." "정말 내가 왜 이러는지 몰라?" "................." "네 놈이 내 도시락 쓰레기통에 처박은 거 내가 모를 줄 알았냐?" 녀석의 얼굴이 하얗게 질린다. "하는 짓이 꼴같잖아서 상대안하고 있었더니....아주 불을 지르는 구나...." 널 어떻게 해야 이 분이 풀릴까? 내 문어 소세지.... 계란말이... 하얀 쌀밥이 쓰레기통에서 울고 있는 소리가 들린다. "내가 했다는 증거 있어?" 하...... 한숨과 나옴과 동시에 갑자기 머리가 아파오며 이 자식을 상대하다가는 괜히 열만 더 뻗칠 것 같은 예감이 마구마구 들었다. 하지만 이대로 이 녀석을 놓아준다면 분해서 잠이 안올 것 같다. 내가 그 도시락을 어떤 마음으로 만들었는데? 네 놈은 단순히 내 도시락을 쓰레기통에 처박은 게 아니라 내 마음을 쓰레기통에 처박은 거다. 그것도 아주 비겁한 방법으로 말이야...불만 있으면 교활한 수 쓰지 말고 나에게 직접 덤비란 말이다. 다시 마음을 가다듬고 주먹을 쥐는 순간 약간 겁에 질린 눈동자를 하고 있는 우연수의 모습이 보였다. 저렇게 비실비실한 놈 한대 쳤다가 괜히 병원비라도 무는 거 아냐? 나에게 아주 불만이 많나 본데 몇 대 터진 거 가지고 괜히 오바해서 입원하면 난 병원비 물고 선생들한테 끌려 다니면서 쪼이고.....재수 없으면 정학이나 근신이라는 상당한 부정적인 결과가 나올 가능성이 크다. 그렇게 되면 저 녀석은 좋아라하고 병원에서 희희낙락거릴 거고 나는 반성문이나 쓰면서 분에 겨워 부들거리고 있을 테지. 훗~ 완전히 뚜껑 열린 상황에서도 이토록이나 냉정한 분석을 하고 있는 내 자신이 약간 자랑스럽다. 그래 똥이 더러워서 피하지 무서워서 피하나? 두 대 친 걸로 만족하고 그냥 상대하지 말자. "경고하는데 우연수...." "한번만 더 교활하게 내 신경 긁으면....그때는 정말 아주 죽여준다." ".............." "더 얻어터지기 싫으면 그만 꺼지지 그래?" 주먹이 우는 것을 간신히 참으면서 최대한 감정을 억제해서 말하자 그래도 꼴에 눈치는 있는지 녀석은 비실비실 일어나서 옥상 입구 쪽으로 걸어간다. 물론 그 전에 이현이 녀석을 쳐다보는 걸 잊지 않았지만..... 확 파내 버리기 전에 그 끈적한 눈깔 당장 치우지 못해? 연수 놈이 내려간 뒤 녀석도 나도 한참동안 아무 말이 없다. 그래도 그 놈이 안보이니 짜증은 안 나는군. 살짝 한숨을 내쉬며 녀석의 옆으로 다가가 털썩 주저앉았다. "나도 한대 줘." 불을 붙여주는 녀석의 하얗고 갸름한 손을 잡은 채 똑바로 쳐다보자 엷은 갈색 눈동자가 왜 그러냐고 물어오는 듯 하다. 아무래도 난 이 투명하고 무감정한 눈동자가 너무 좋다. "조이현....나 지금 너한테 무지 화가 난다." "................" 녀석과 어울리지 않는 따뜻한 체온이 떨어져 나가자 가슴 한쪽에 조그만 상실감이 느껴진다. 내가 누군가에게 이토록 빠질 줄 정말 상상도 못했었다. 이 녀석의 투명한 갈색눈동자와 건조한 분위기는 나를 미치도록 매혹시킨다. "그 녀석 도시락 맛있었냐?" ".........별로..." 그러면서 왜 먹었냐? 짜증나게........ "나......너 좋아한다." 투명한 갈색의 눈동자와 마주쳤을 때부터 계속된 미열이 고백을 해버린 순간 거대한 열꽃이 되어 내 몸속에 피어났다. 나의 갑작스러운 고백에 녀석이 약간 놀란 눈동자를 하더니 금세 냉정을 되찾는다. 감정정리.....지나치게 빠른 거 아니냐? 나 스스로도 이런 말한 게 꽤 놀랍단 말이다. 조금 더 동요해 주면 안되냐? 내 목소리 떨리고 있는 거 넌 못 느껴? 갑작스럽긴 하지만 결코 가볍게 한 말이 아니란 말이다. "언제부턴지......왜인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야.....정신을 차려보면 항상 널 쳐다보고 있더라." "......알고 있었냐?" ".......아니........" 그렇겠지...넌 언제나 그런 표정이었으니까.....늘 아무것도 관심 없다는 표정. 지독하게 둔한 새끼.....내가 왜 너 같은 놈한테 반해버렸는지 모르겠다. 하긴, 누굴 좋아하는 데.... 반해버리는 데 특별한 이유가 어디 있겠냐만은..... 그래도 네 무엇이 그리 좋냐고 누군가 묻는다면 나는 네 눈동자라고 말할 거다. 나를 미치게 하는 너의 무심하고도 멍한 갈색눈동자가 아무리 눈 돌리려고 해도 자꾸만 나를 휘감아 버려......마치 끈끈한 거미줄처럼.....너 그거 알고나 있냐? "둔한 놈.........내가 너한테 갖다 바친 도시락이 몇 갠데...." 내가 담배 한 개피를 다 필 동안 녀석은 계속 침묵을 지켰다. 녀석이 어떻게 나오건 이걸로 내 패는 이제 다 보였다. 성급하게 말해버린 감도 없지 않지만 이 무심하고 둔한 놈이 뜸들이며 끙끙 앓는다고 해서 알아줄 놈도 아니고.....6개월이면 나도 많이 버틴 거다. 그래...평생 걸리지 않을 것 같던 상사병에 걸려 미쳐도 보고....길다고도 짧다고도 말할 수 없는 지난 6개월 동안 꽤 많은 일이 있었던 것 같다. 이 녀석을 보고 있으면 언제나 나는 정상이 아니게 된다. 평소의 이성과 차분함은 어느새 날아가 버리고 조급함과 함께 몇 달 동안이나 나를 괴롭히고 있는 이 지긋지긋한 미열이 발작해버린다. 걷잡을 수 없는 열정,,,, 갈망.... 그리고 목마름..... 너는 내게 그런 것을 느끼게 한다. 지독하게 자신밖에 모르던 나를 너를 향한 아찔한 열병에 시달리게 만든다. "난 진심이니까 너도 내가 역겹지만 않으면 진지하게 생각 해줬으면 좋겠다." 아무렇지 않게 꾸민 가벼운 말투에 이현이 약간 고개를 끄떡인 것 같다. 그래...일단 그거면 된거다. 오늘은 남자라는 이유로 날 밀어내지 않은 것에만 만족 하련다. 반드시 너도 날 좋아하게 만들테니까....너도 나로 인한 열병으로 시달리게 할 테니까. "그리고 앞으로 그녀석이 가져오는 건 먹지마라." 난 철저한 개인주의자다. 내가 손해 보는 장사 따윈 절대 사절이다. 얼마 후 넌 나에게 미치게 될거다. 마치 지금의 나처럼. 그래....반드시 그렇게 되도록 내가 만들거다. 내 마음에 들어버린 이상 넌 선택할 권리 따윈 없어. 그렇게 녀석에게 또는 나 스스로에게 암시를 걸며 이현을 내버려 둔 채 옥상에서 내려왔다. #정염 (情炎) 소년의 열정은 모든 것을 불태우는 정염(情炎)의 불꽃이다. 고백한지 어느새 일주일이 지났지만 유감스럽게도 변한 것은 별로 없다. 나는 여전히 아침 일찍 일어나 녀석의 도시락을 만들고 있고 이현은 언제나 처럼 묵묵히 그것을 먹을 뿐이다. 우연수처럼 녀석 옆에 하루 종일 달라붙어 있고 싶긴 하지만 내 욕심 때문에 녀석을 부담스럽게 만들고 싶지 않다. 내가 겪어봐서 알지만 지나친 접근은 부작용을 일으킬 뿐이다. 상대를 배려하지 않고 자기감정에 미쳐서 심하게 달라붙으면 그 때부터 그 사람은 상대에게 사람이 아니라 거머리나 진드기로 보일 뿐....더 이상 의미를 가질 수 없다는 것을 난 잘알고 있다. 그러니까 너무 달라붙지 말라구.....우연수. 지금 조이현 눈에 넌 털이 숭숭 난 징그러운 진드기로 보일 수도 있단 말이야.... 진드기 중에서도 말라빠지고 볼 품 없는 진드기....아주 못생긴 진드기로 말이야.... 이현의 옆에서 가증스러운 웃음을 짓고 있는 우연수에게 그렇게 텔레파시를 날리며 비죽이 웃어주자 녀석은 눈꼬리를 올리더니 나에게 혀를 내밀어 메롱이라고 하고는 고개를 휙 돌리고 또 재잘재잘 떠들어 댄다. 유치한 새끼....한 번 만 더 혀 내밀면 아예 뽑아주마. 아무런 진전 없이 시간이 흘러가면서 서서히 여유가 없어지는 건 사실이지만 그냥 이렇게 녀석에게서 한발자국 떨어져서 바라보는 것도 나름대로 꽤 괜찮은 것 같다. 이소희 앞에서 만큼은 아니지만 가끔은 나를 보고 웃는 것 같기도 하고(이건 어디까지나 내 추측이다.) 적어도 날 남자라는 이유로 경멸하면서 밀어내지 않으니 우선은 이정도로 만족해야겠지. 언제가 되든 난 결국 녀석을 손에 넣을 거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가지게 된 소유욕과 갈망에 최대한 솔직하게 반응하고 있는 내 모습이 약간 사랑스럽기도 하면서도 기쁘다. 처음으로 해보는 노력. 처음으로 가지는 집착. 그리고 처음으로 느낀 두근거림.....녀석에겐 모든 것이 처음인 것투성이다. 그렇게 소중하고 사랑스러운 것을 강압적으로 얻어낼 생각은 없다. 나처럼 조이현도 정말로 마음속 깉은 곳으로부터 나를 원하도록..... 심장이 터져버릴 듯 나에게 두근거리도록 천천히 부담 없이 다가가야 거다. 그렇게 스스로를 달래고는 있지만 너무나 정직한 내 다리는 마치 자석에 끌려가듯 어느새 녀석의 집을 향해 걷고 있다. 원래 결석이 잦은 놈이니.....별일이야 없겠지만 그래도 혹시나 감기 걸려서 골골대며 누워있는 게 아닌지 걱정된다. 그냥 돌아갈까? 끈질긴 인상은 주고 싶지 않은데.... 벨을 누를까 말까 한참 고민하다 가만히 문고리를 돌리자 놀랍게도 문이 스르르 열렸다. 문도 안 잠그고 뭐하는 거야? 도둑 들면 어쪄려고.... 혹시 문도 못 잠글 정도로 많이 아픈거 아냐? 그러나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나의 걱정이 상당히 쓸모없는 것이었다는 것을 확실히 깨달았다. 하아. 하아. 앗...아앙~ 폭신해 보이는 소파위에 뒤엉켜 있는 남녀의 나신이 보인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녀석의 몸위에서 정신없이 허리를 놀리며 연신 교태스런 신음을 뱉어내는 여자의 모습이 눈 속에 한가득 들어왔다. 뜨겁다. 녹아버릴 정도로 뜨겁다. 이현에 대한 배신감과 여자를 향한 살기에 가슴속 깊은 곳에 봉인해 두었던 열병이 서서히 발작하기 시작하며 내 이성을 날려버린다. 그 뒤 내가 어떤 행동을 취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정신을 차려보니 여자는 보이지 않았고 거실은 물건들이 부셔저 바닥에 흩어져서 엉망진창이 되어있었다. 그 아수라장 속에서 이현은 여전히 건조한 갈색눈으로 나를 조용히 쳐다보고 있다. 그 색소 엷은 눈동자를 보자 이상하게도 목구멍까지 치밀어 오른 뜨거운 불덩어리가 서서히 가라앉으며 다른 의미로 나를 뜨겁게 달군다. 소파에 기대어 있는 녀석의 하얗고 탄력적인 나신을 눈으로 샅샅이 훑어 내리다 흥분에 있는 그곳에서 시선이 멈췄다. 그러고 보니 한참 즐기고 있을 때 내가 깽판 놓은 꼴이군..... 녀석에게 다가가 잔뜩 흥분한 것을 손으로 부드럽게 쓸어 올리자 이현이 낮은 숨을 들이키며 몸을 움찔거린다. 그와 동시에 내 분신은 고개를 처들며 내 이성을 강하게 압박해 왔다. 그래.....이제야 알았어. 이 열의 정체가 뭔지...... 너를 향한 이 지독하게 강렬한 욕망이 나를 들뜨게 한다. 갖고 싶다. 나는 바지와 브리프를 한번에 벗어버리고 이현의 허벅지에 걸터앉아 녀석의 것에 내 것을 천천히 비비기 시작했다. 까슬까슬하게 느껴지는 자극적인 마찰감을 즐기며 녀석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자 이현의 갈색 눈동자에 욕망의 어두운 그림자가 짙게 드리운다. 그 눈동자가 너무나 사랑스럽다. 평소의 무표정한 엷은 눈동자가 아닌 질식해버릴 정도로 솔직한 욕망을 드러낸 그 눈동자가 나를 미치게 한다. 엉덩이로 녀석의 것을 강하게 부비면서 도톰하고 보기 좋은 입술에 키스하자 따뜻하고 물컹거리는 혀가 서로 섞이며 끝없이 서로를 희롱한다. 새어나온 녀석의 정액으로 엉덩이가 완전히 축축해지자 나는 애널속에 손가락을 집어넣어 좁고 빡빡한 그곳을 넓히기 시작했다. 녀석의 것을 빨리 넣고 싶은 마음에 조급해 져서 급하게 손가락 수를 늘리자 짜릿한 통증이 느껴진다. 이현의 혀에 농락당하던 내 유두는 꼿꼿이 서서 조그만 자극에도 탄성을 지르며 움찔거린다. 녀석의 손길에 페니스는 터질 듯이 부풀어 오르고 사정의 욕구가 숨통을 죄어오며 내 안에 숨어있던 음란하고 새된 교성을 폭발시켰다. 황홀하게 자극하던 손길이 고통스럽게 나를 꽉 죄어온 것은 그 순간이었다. 풀리지 않은 사정의 욕구와 지독한 아픔에 초조함을 느껴 녀석의 머리카락을 잡아서 거칠게 고개를 들어올리는데.......이현이 눈꼬리를 살짝 올린 채 희미하게 웃고 있었다. 그 희미한 웃음이 너무나 아름답고 황홀하면서도 잔인해 눈물이 난다. "아....파..." "..............." "놔...줘.....제발....." ".............." "...........뒤로 하고 싶은데....." 낮게 잠긴 허스키한 목소리에 아찔함을 느끼며 녀석에게서 내려와 바닥에 엎드린 채 다리를 벌리고 녀석을 향해 엉덩이를 내밀었다. 부끄러움? 창피함? 그딴 건 내 머릿속에 없었다. 오히려 정신이 나가버릴 만큼 자극적으로 녀석을 느끼고 싶을 뿐이었다. 녀석을 가져야 한다는 내부의 절대명령에 이 위험하고도 뜨거운 행위에 몰입한다. 이현은 목뒤로부터 허리아래의 척추선까지 부드럽게 혀로 훑어 내린 후 양손으로 엉덩이를 꼭 쥐더니 그 위에 강하게 이를 세웠다. "아윽!" 정말 눈물이 날 정도로 아프다. 나의 고통스런 신음소리에도 불구하고 녀석은 다른 한쪽에 마저 이를 세우고는 천천히 그 부분을 핥기 시작했다. 할짝거리는 소리와 함께 희미한 비릿한 피 비린내가 나는 듯 하는 듯 하더니 뜨겁고도 굵은 불덩어리가 내 몸속에 뚫고 들어온다. 갑작스럽게 찾아오는 고통에 신음을 내지르며 몸을 바둥거리자 녀석은 낮은 한숨같은 신음소리를 내며 천천히 내 속을 후벼 파기 시작했다. 정말 돌아버릴 정도로 아팠지만 내 속을 가득 채우고 있는 녀석에게 포만감과 만족감이 느껴져 엉덩이에 힘을 주며 그대로 녀석을 빨아들였다. 내장을 쳐올리는 듯한 그 움직임에 압박감과 함께 스멀스멀 무언가 기어 올라온다. 그 아리하고 간질간질한 것을 더욱 느끼고 싶어서 힘을 빼고 더욱 허리를 흔들자 녀석의 것이 한층 강하게 찔러오며 온몸을 쥐어뜯는 쾌감이 느껴졌다. 미친다. 미쳐버린다. 이 뜨겁고 황홀한 감각에 온몸이 마비될 것 같다. 마치 발정난 짐승처럼 정신없이 엉덩이를 흔들어대다 펑하고 머릿속이 터져버리며 뱃속이 따뜻해져 오는 순간 그 지독한 쾌락에 이상하게도 눈물이 났다. 녀석을 가졌다는 뿌듯함과 만족감.....그리고 안타까움... 그렇게 녀석에 대한 나의 열병은 조금 사그라드는 듯 했다. 그에게 있어 과연 나는 무엇일까? 그 날 이후로 우리는 종종 섹스를 한다. 하지만 몸을 섞기 전보다 더욱더 녀석을 갈망하는 내 자신을 보며 나는 절망한다. "싫은데..." "내가 왜 네 선배의 대타를 뛰어야한다는 거지? 이소희를 바라보며 차갑게 말하자 녀석은 빙긋이 웃으며 대답한다. "형이 나한테 부탁했으니까..." 동문서답......질문의 요지를 파악하지 못하는 건가? "하여간 싫어.....알바 할 정도로 한가하지 않다." "흥~그래? 이현이가 일하는 곳인데도?" ".....!......" 이소희는 여전히 사람 좋은 미소를 흘리며 느긋하게 나를 쳐다보고 있다. 이미 내 대답을 다 알고 있다는 표정. 이제 와서 말 바꾸는 것도 쪽팔리고....이대로 거절하기엔 너무 아깝다. "할께." 자존심보다 사랑이다. 뭉개진 자존심이야 녀석을 손에 넣은 뒤에 천천히 회복시켜 줄 테다. "....솔직하네..." 이소희는 그렇게 말하면서 약간 씁쓸한 얼굴을 한다. 왜 저런 표정을 짓는 거지? 나와는 달리 서글서글하니 인상 좋고 성격도 좋아서 늘 주위에 사람이 끊이지 않는 놈이 가끔씩 저렇게 보는 사람이 한숨이 나올 정도의 안타까운 표정을 지을 때면 그 의외성에 묘한 기분이 된다. 가게는 호프집이라기 보다니 클럽 같은 분위기가 났다. 화려한 조명하며 인테리어가 고급스러운 듯 하면서도 어딘가 퇴폐적인 느낌을 준다. 이런 곳에서 고등학생 알바를 쓰다니. 가게 안을 이리저리 둘러보고 있는데 유니폼 차림의 이현이 나왔다. 차이나식의 하얀 셔츠에 까만 랩 스커트는 호리호리한 녀석의 몸에 착 감겨서 몸의 라인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저런 옷을 입고 일하는 건가? 완전 눈요기 감이군..... 미성년자 고용에다 퇴폐영업으로 경찰에 확 꼬질러 버려? "따라와." 이현은 퉁명스럽게 내뱉곤 빠른 걸음으로 걷기 시작한다. 매정한 놈....좀 다정하게 말하면 안되냐? 차가운 성격은 아닌데 저 극도의 무심함은 오히려 차가움 보다 사람을 더 질리게 한다. 섹스 할 때 말고는 표정변화도 거의 없고 고백을 해도 반응이 없으니.....정말 답답하다. 나날이 녀석이 나를 좋아하게 만들겠다는 자신이 없어져 가는 것이 느껴진다. 생각 외로 가게는 바빴고 이리저리 안주와 술을 나르느라 몇 시간 동안 정신없이 바빴다. 그렇게 바쁜 와중에 어느 곳에나 그렇듯 싸가지 없는 손님들이 몇 명 있었지만 뭐 내 성격에 자동적인 즉각 무시로 대응했고 대부분은 그런 내 반응에 지쳐서 떨어져 나갔다. 그리고 좀 시끄러워 질 것 같은 경우에는 동화라는 사람이 요령 좋게 상대해줬기 때문에 처음해보는 일인데도 불구하고 요 몇 시간 동안 특별한 트러블 없이 일할 수 있었다. 그래 이 변태중년이 내 엉덩이를 주물럭거리기 전까지는..... 이런 곳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중년의 남자가 술을 얼마나 처먹었는지 완전 맛이 가서는 추가 주문을 받으러 온 내 엉덩이를 기분 나쁘게 더듬거리기 시작했다. 씨발....이게 미쳤나......암만 술을 처먹었어도 그렇지 사내새끼 엉덩이를 더듬어? 그래도 일단은 손님인지라 당장이라도 튀어나올 것 같은 욕지꺼리를 간신히 참으며 말했다. "이 손 치우시지요. 손님." 그 놈은 내 말에 상당히 느끼하게 웃더니 더욱 강한 힘으로 내 엉덩이를 그러쥐며 말한다. "토실토실하니.....한손에 딱 들어오는군......네 속은 더 죽여 줄테지? 쪽팔리게 시선 끌기 싫어서 참았더니... 이 새끼가 죽으려고 환장했군.... 엉덩이를 더듬거리다 대담하게 더욱 안쪽으로 파고드는 손가락을 잡아 그대로 꺾어 버렸다. "우아악!" 남자가 눈을 뒤집으며 비명을 지른다 . 그러고 보면 세상에는 생각외로 변태가 많은가 보다. 이런 중년아저씨가 여자가 아닌 다 큰 사내놈의 엉덩이를 주물럭거릴 줄 누가 예상이나 했겠는가? 생각 같아선 아예 반 죽여 버리고 싶지만 일단은 손님이고..... 손가락 두개 꺾은 걸로 봐줄 테니까 집에 가서 마누라 엉덩이나 만지라고... 엄살을 피우며 신음을 흘려대는 남자를 나둔 채 대충 테이블에 놓여있는 빈 접시를 수거하고 뒤로 돌아보자 조이현이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쪽팔리게 시리.........설마 다 본건가? 녀석은 그렇게 나를 한참 뚫어지게 쳐다보더니 갑자기 획하고 고개를 돌리고 테이블을 세팅하기 시작한다. 저 녀석. 지금 왠지 노려봤던 것 같은데..... 기분 탓인가? 바쁘게 일하다 보니 어느새 12시가 지나있다. 아까 그 변태중년은 어느새 가게를 나갔는지 보이지 않는군.... 손님이 어느 정도 빠지자 아까까지는 느끼지 못했던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오면서 다리가 무거워 진다. 이런 육체노동도 아무나 하는 게 아니군....나 같이 지구력 없고 몸 움직이는 거 싫어하는 타입에게는 절대 무리야. 힘없이 휘적거리며 남아 있는 테이블을 대충 정리하고 있는데 동화씨가 퇴근해도 좋다고 말했다. 그거 듣던 중 반가운 소리네.... 행주로 테이블을 마저 닦고 남아 있는 안주 그릇을 옮긴 뒤. 옷을 갈아입기 전에 화장실에 들러서 손을 씻고 있는데 어디서 희미한 신음소리가 들려온다. 뭐지? 약간의 긴장감과 공포심을 느끼며 소리가 나는 칸으로 다가가 문을 벌컥 열자 피떡이 된 사내가 눈물과 콧물이 범벅이 된 채 화장실 구석에 처박혀 있었다. .............. 나 말고 또 다른 놈 엉덩이라도 주물렀나 보지? 언뜻 보아하니 팔모양이 이상한 게 부러진 것 같다. 누군진 모르지만 그 놈 굉장히 화끈한 놈일세....후후.....속이 다 시원하다. 겁먹은 표정으로 나를 향해 도움을 청하던 변태중년을 향해 비죽이 웃어주곤 발로 얼굴을 살짝 까버린 뒤 화장실에서 나왔다. "준현이 아직 안 갔었니? 이현이는 벌써 나갔는데..." 좀 기다려 주지...그 새를 못 참고 가버리냐? 매정한 놈. "지금 갈 거예요." ".....아 그리고 동화형, 화장실 청소해야 겠던데....." "그래? 많이 지저분하니?" ".....뭐....지저분 한 것도 있지만 처치 곤란한 쓰레기가 있어서요." 초스피드로 옷을 갈아입고 밖으로 뛰어나왔다. 지금부터 뛰면 따라잡을 수 있을지도... 꽃샘추위에 훤한 목에 닭살이 돋늗다. 옷깃을 단단히 여미고 막 달리려는데 등 뒤에서 낯익은 허스키가 들려왔다. "꾸물거리기는..." 설마..... 심장 박동이 빨라짐을 느끼며 천천히 뒤로 돌아보자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녀석의 모습이 보인다. 하얀 벽에 기대서서 담배를 꼬나물고 있는 녀석이 너무 사랑스러워서 당장 달려가 세게 끌어안고 싶다. "기다려 준거냐?" "................" "나 감동 먹었다. 조이현." 가까이 다가가자 이현은 무표정한 얼굴로 담배를 비벼끈 후 갑자기 내 목을 끌어당겨 강하게 키스한다. 목에 감긴 얼음장 같이 차가운 손과는 반대로 녀석의 입술은 너무 따뜻했다. 근데 갑자기 왜 이러는 거지? 누가 보면 어쩌려고..... 나와의 관계에서 그다지 적극적이지 않던 녀석의 갑작스런 대담한 행동이 약간 당황스럽다. 그러고 보니 녀석이 먼저 내게 키스해 주는 건 처음이지....... 마치 첫키스 같다. 두근거리는 심장소리를 들으며 녀석의 따뜻한 혀와 입술의 감촉을 즐기면서 서로의 온기를 나누자 가슴한편이 따뜻해져 온다. 녀석과 만난 뒤로 사고능력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나를 감동시키는 것이 녀석의 차가운 손인지 따뜻한 키스인지 알 수가 없다 단지 언제나 이 녀석을 미치도록 원한다는 것만 느낄 뿐.... 그렇게 우리는 서로의 입술에 취해 한참동안 차가운 밤바람을 맞고 있었다. #차단 모든 일은 항상 사소한 일을 계기로 시작된다. 마치 개미 둑이 무너지는 것처럼... 하나의 조그만 구멍이 내부를 갉아먹다 한순간에 모든 것들을 무너뜨린다. 조그만 의심과 초초함은 그렇게 나를 무너뜨렸다. 겨울에나 있는 삼한 사온 현상.... 여름의 무더위..... 4월의 변덕스런 봄 날씨는 사람의 마음을 짜증나고 지치게 한다. 조이현은 나에게 호감을 느끼고 있는 것 같으면서도 묘하게 내게 거리를 두며 일정 거리이상은 다가오지 않는다. 섹스를 하는 동안만은 나를 강하게 끌어안고 온기를 나누지만 섹스가 끝나고 나면 다시 자신의 건조한 모래성으로 미련 없이 들어가 버린다. 도대체 뭐가 문제지? 왜 내게 확실히 다가오지 못하는 거야. 이제까지는 내가 네게 다가갔지만 이제 그만 네가 나에게 다가와주면 안되냐? 그렇게 녀석에 대한 내 마음이 커지는 데 비례하여 나의 불안과 초조감 역시 정비례하여 커진다. 몸으로만 엮어져 있는 관계....날씨 탓인지 오늘 따라 왠지 서글프다. 게다가 우연수는 그 날 이후로 나를 더 흰눈으로 바라보며 사사건건 시비를 걸어온다. 차라리 직접 덤벼오거나 하면 상대하기 쉽겠는데 뒤에서 내 욕을 하거나 아니면 사소하게 신경을 긁어대는 말로 공격하기 때문에 정말 난감하다. 원래 난 인간들이랑 얽히기 싫어하는 성격인데다 이런 종류의 공격에는 상당히 취약하기 때문에 부글부글 끓으면서도 애써 녀석을 무시하고 있지만 나와는 달리 여우같은 그 놈은 오히려 그런 내 성격을 이용해서 반 놈들을 제 놈 등에 업고 기고만장하게 설쳐댄다. 성질 같아서는 저 까불거리는 얼굴을 확 밟아 뭉개고 싶다. 거의 우리반에 살다 시피 하는 놈이 꼴 보기 싫어서 옥상창고 위에 올라와 음악을 듣고 있는데 갑자기 CDP의 건전지가 떨어졌다. 젠장....오늘따라 정말 왜 이러냐? 교실에 내려가 여분의 충전지를 가져올까 해서 자리에서 일어나는데 귀에 익은 목소리가 아래에서 들려온다. "너 그 녀석 어쩔 생각이냐?" 이소희의 목소리다. 그렇다면 상대는...... 아래를 내려다보자 예상대로 이현과 이소희가 담배를 피며 얘기를 하고 있었다. 왠지 반가워서 내려가려고 하는 데 이어 지는 이소희의 말이 내 행동을 멈추게 했다. "서준현은 너한테 진심인 것 같던데......넌 어떠냐?" 두근. 두근. 두근. 심장이 미친 듯이 뛰어댄다. 그 동안 쭉 묻고 싶었지만 녀석을 채근하는 같아서 매번 목구멍에 삼켰던 말이 이소희의 입을 빌러 흘러나온다. 그래.....넌 나를 어떻게 생각하냐? ".....뭘....." 이현이 귀찮다는 듯이 내뱉는다. "몰라서 묻냐? 너희 몸 섞는 관계인줄 내가 모를 줄 알았어? " "그 놈이 아무리 꼴리게 생겼다지만 그래도 사내새끼고 전혀 계집애 같지도 않잖아. 키도 너 만하고....네가 무슨 생각으로 그 놈하고 몸까지 섞는지 알고 싶어서 그런다." "................" "........기분 좋아......" 두근. 두근. 두근. 혈관이 터지는 듯 하다. 나는 조용히 숨죽인 채 이현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녀석하고 섹스 하는 거.......기분 좋아." 와장창......가슴속의 무언가가 산산 조각나는 소리가 들린다. 귀를 막고 싶다. 앞으로 녀석이 무슨 말을 할지 두려워진다. 들으면 안돼.....예감이 좋지 않다. 의심하면 안된다. 초조해 하면 안된다. 녀석과 나는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았다. "그럼 단지 서준현은 매력적인 섹스 상대일 뿐이라는 거야?" ".............." "..........그럴.....지도....." 결국 들어버렸다. 내 귓속으로 들어온 깨어진 날카로운 파편들이 내 머리와 가슴을 사정없이 찢는다. 그게 내 고백에 대한 네 답이냐? 조이현.....정말 사람 비참하게 만드는 데 비상한 재주가 있구나. "그거 진심이냐? 이현아. 너 그런 놈 아니잖..." 더 이상 듣고 있을 수 없었다. 어쩌면 진심이라고 말할 것 같은 이현의 다음 말이 두려웠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자존심이 강한 인간이다. 비록 너 때문에 다 버려 버렸지만 간사한 나는 이제 내 잃어버린 자존심을 되찾을 거다. 내가 옥상창고에서 뛰어내리자 이소희는 눈을 왕방울만큼 크게 뜨더니 하던 말을 멈추고 나와 이현을 번갈아 보며 어쩔줄 몰라 한다. 그럴 필요 없어. 이소희. 난 네 그런 배려가 필요한 약한 인간이 아니거든...... 처음으로 인간에게 받는 상처라 아프긴 하지만 어쩌겠냐? 조이현도 갑작스러운 내 등장이 상당히 놀라운 모양인지 그 예쁜 엷은 갈색 눈동자에 동요의 빛을 가득 담은 채 나를 바라본다. 그런 녀석에게 나는 천천히 웃어주며 말했다. "미안하지만 들어버렸다." "네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 지 항상 궁금했었는데.....오늘에서야 그 답을 듣는군." "................" "나는 너를 진심으로 좋아했었는데 말이야.....넌 단지 몸뿐이었다니.....좀 씁쓸하네..." 바람이....이 몸에 척척 감기는 바람이 너무나 불쾌하다. "오늘부터 너는 나에게 아무것도 아니다. 조이현." "이제 너랑 섹스도 안할 거고....." "아는 척도 안할거다. 그렇게 말하면서......녀석에게 선언하면서 나는 웃었다. 아주 상쾌하다는 듯이 그리고 너 따위에겐 아무 미련 없다는 듯이.....그리고 약간은 안타까운 마음으로.....그렇게 녀석에게 말하고 뒤로 돌아서자 갑자기 녀석이 내 팔을 잡는다. 내가 그렇게 좋아했던 색소 엷은 눈동자가 무언가를 말하고 싶은 듯 나를 붙잡았지만 나는 차갑게 그 손을 쳐내고 마지막으로 덧붙였다. "그동안 즐거웠다. 조이현." 녀석의 시선을 뒤로하고 나는 꼿꼿이 앞을 향한 채 걸어간다. 지금이라도 저 시선에 부질없는 희망을 갖고 뒤돌아보고 싶다. 하지만 나는 그러지 않을 거다. 정말 깨끗하게 널 내 마음속에서 차단시킬 거다. 왜 하필 그 때 건전지가 다 되어버렸을까? 왜 하필 나는 그 곳에 있었을까? 왜 하필 나는 이토록이나 무심한 너를 사랑하게 되었을까? "안 잡냐? 이현아." "............." "녀석 앞에서 그런 눈을 하지 그랬냐? 왜 뒷북치고 난리냐?" "............." "정말 섹스 상대였냐?" ".......그럴.....지도.....하지만......같이 있으면 기분 좋아." "자유로우면서 뜨거워....." "내가 점점 이상해져......갖고 싶어서 견딜 수가 없어....." "너 설마.........그 녀석에게 버림받는 게 무서운 거냐?" "................." "네 심정도 이해는 가지만..." "그래도 서준현은 널 절대 배신하지도 버리지도 않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그 놈 눈동자 봤냐? 그렇게 곧은 눈동자로 너만 보는데 너는 어째서 그녀석이 널 떠나버릴 것이라고 생각하냐?" ".............." "늦기 전에 잡아라. " "아니 이미 늦었더라도 잡아라." 그렇게 말하고 나는 이현이를 남겨둔 채 교실로 돌아왔다. 저 여리고 약한 놈이....저 무심한 놈이.......상처받을게 무서워 웅크리고 있는 것이 안타깝다. 물론 그럴 수밖에 없겠지만.... 서로 좋아한다고 해서 모든 게 해결되는 건 아닌가 보다. 나에게는 그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지만......오늘은 정말 뒷맛이 나쁜 하루다. 나는 다시 7개월 전의 생활로 돌아왔다. 하지만 습관이라는 것은 무서운 것인지 어느새 2인분의 도시락을 만들고 마는 자신을 볼 때면 굉장히 허탈해진다. 차마 버릴 수는 없어 억지로 입으로 퍼넣다 보면 아무런 맛을 느낄 수도 없고 구역질만 났다. 그렇게 맛없는 도시락을 먹고 기계적으로 공부를 하다 집으로 돌아오면 매일 펄펄 끓어대는 내 몸의 열기를 식히기 위해 한참동안을 찬물로 샤워를 해야 했다. 샤워를 끝내고 알몸으로 전신 거울 앞에 서자 연한 갈색 빛의 마르면서도 길게 뻗은 내 몸이 보인다. 그리고 눈가에 있는 갈색의 점.....이 점 때문에 어릴 때는 계집애 같다고 놀림 받았지만 섹스할 때마다 녀석이 이 곳에 키스해서 그런지 지금은 상당히 애착이 간다. 눈가를 가만히 만지자 마치 녀석의 입술의 느낌이 남아있는 듯해서 두근거린다. 역시 사람 마음이라는 것은 무 자르듯 자를 수 없는 지, 이현을 내게서 차단시킨 후에도 나는 내 몸에 남아있는 녀석의 흔적을 만지며 그 녀석을 향한 욕망을 달랜다. 3주 동안 내 엉덩이에 남아 있는 이빨자국이 많이 옅어져 이제 희미한 갈색을 띄었다. 내가 녀석을 밀어내는 것인데도 불구하고 이 옅어져 가는 흔적을 보면 녀석이 내게서 멀어져 가는 것 같아 기분이 나쁘다. 좀 더 세게 물어주지.... 이런 미친 생각을 하는 자신을 조소를 하면서 샤워기의 손잡이를 잠궜다. 야간 자율학습이 끝날 때까지 거의 3주 동안 내내 이현은 나를 기다리는 듯 교실에 남아있었지만 나는 그를 철저히 무시했다. 언제나의 나처럼 싸가지 없이....자기만 아는 놈으로 돌아와 녀석을 완벽하게 내게서 차단시켰다. 그리고 그 때마다 녀석의 얼굴에 하나둘 작은 상처가 생기기 시작했다. 하얀 얼굴에 생긴 상처들을 볼 때마다 뭔가 속에서 울컥 울컥 치밀었지만 나는 애써 평정을 유지하면서 그를 외면했다. 그래......나는 원래 이런 놈이다. 한번 끝이면 영원히 끝내버리는 냉정하고 독한 놈...... 아무리 너라도......절대 흔들리지 않을거다. 그렇게 하루하루 맛없는 밥을 먹어가며 미친 듯이 공부에만 열중했다. 어느 새인가 우연수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거칠어진 녀석에게 겁먹어서 오지 않는 것이겠지..... 조이현이 학교에 오지 않았다. 녀석을 외면하면서도 어느새 녀석의 모습을 쫓게 되는 이 모순 되는 지긋지긋한 습관. 언제쯤이면 완전히 지워 버릴 수 있을까? 대충 가방을 싸고 나오는 데 이소희가 교문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무슨 일이지? 그 녀석을 연상시키는 너와도 되도록이면 마주치고 싶지 않은데.... "너 참 지독하더라. 서준현." 녀석을 그대로 지나치려는데 이소희가 빈정거리듯이 말한다. "뭐가..." "몰라서 묻냐? 설마 네가 이현이한테 그렇게 까지 할 줄은 몰랐다." "내가 뭘 어쨌는데...." ".............." 순간 이소희의 눈이 격한 감정으로 가득 차 반짝거린다. 그래 이런 느낌이었었지....맑고 반짝거리는 순수한 느낌......그 녀석과 상당히 닮아있다. 어릴 때부터 친구라고 하더니.....이런 것도 닮는 구나. 이 순간에도 이소희를 질투하고 있는 내 모습이 우습다. "그 놈 너 좋아한다." 두근. 이놈의 주책맞은 심장이 저 뜬금없는 말에 다시 발작하기 시작했다. "무슨 헛소리를..." "표현을 못해서 그렇지.......그 녀석....네가 상상도 못할 만큼 너한테 빠져 있다구." "너희 둘의 문제니까.....되도록이면 간섭하고 싶지 않았는데.....난 더 이상 그 놈 아파하는 꼴 못보겠다." "................" "그러니까 그렇게 차갑게 자르지마." "그 녀석 요즘 미친 듯이 싸우고 다니는 거 아냐?" "그 자식이 너 때문에 아파서 돌아 버리려는 게 보여서......마음이 아프다." 이봐....아프고 상처 받은 건 나라구...... "상처가 많은 놈이다. 그래서 널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거고,,,," "................." 상처 없는 인간이 어딨어? 누구나 그런 건 가지고 사는 거라구. "그 녀석 고아다." "!!!!!!!!!!!!!!" "술주정뱅이에다 도박꾼인 아저씨한테 질려버려서 아줌마가 집나가 버린 게 그 녀석 12살 때지. 3년 전에는 노숙 생활 하던 그 녀석 아버지도 길에서 얼어 죽었다고 하더라. 그 뒤로 계속 친척집을 전전하다가 다행히 지금은 미국에서 돌아온 녀석 외삼촌이 집도 마련해주고 학교도 보내주고 있지만...." "그 녀석 정말 힘들게 살았던 거 아냐?" 잘사는 집안의 도련님 같은 이미지 였는데.....의외다. "사람들한테 고아라고 무시당하면서 상처받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며 살더니 결국 성격이 그 모양으로 변해버리더라." "그래서 녀석은 사랑받는데 서툴러." "..............." "그리고 사랑하는 방법도 몰라." "그냥 당황하고 어쩔 줄 몰라서 발을 동동 굴릴 뿐." 그 투명한 갈색 눈, 그건 역시 네 본질이었구나. 내가 잘못 본 게 아니었구나. "서준현. 나는 네가 그 녀석에게 조금 더 다가가 줬으면 좋겠다." 내가.......녀석에게 더 다가가라고? "....거절의 말도....." "또 고백의 말도 네 입으로 들으니 아주 기분이 묘한데? 이소희" "하지만 이 이상 녀석에게 다가가지는 않을 거다." "날 원한다면 조이현 보고 직접오라고 그래. 오늘 하루 정도는 기다려 줄 테니깐." "................" "어쨌든 참견 고맙다." 가슴속에서 무언가 소용돌이친다. 녀석이 나를 좋아한다. 녀석이 나를 원한다. 주체할 수 없이 다시 발작해오는 열에 나는 집으로 향해 정신없이 뛰기 시작했다. 눈가가 뜨거워지면서 눈앞이 뿌옇게 흐려진다. 희열......이 미칠 것 같은 희열을 나를 집어삼킨다. 그래.....와라.....조이현.....이제 네가 나에게 다가와라. #교차점 집으로 정신없이 뛰고 있는데 골목길에 서있던 무리들과 마주쳤다. 누구? 얼굴을 확인하려는 순간 복부에 주먹이 박혀온다. 다시 날아오는 주먹을 피하며 발로 상대의 턱을 날려버리자 그 녀석은 신음소리를 내며 뒤로 주춤 물러났다. 다섯 명.....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으면서도 기억이 나지 않는 놈들..... 이 놈들과 나를 얽히게 하는 연결고리가 뭐지? 결코 좋은 성격은 아니지만 그래도 집단구타를 당할 정도로 원한 산일도 없는 것 같은데......동시에 달려드는 녀석들에게 적당히 맞아주면서 급소를 공격하자 녀석들은 하나 둘 신음을 흘리면서 떨어져 나간다. 그래도 그 중에 두 놈은 꽤나 맷집이 좋은지 끈질기게 달려들어 왔다. 점점 몸이 지쳐감을 느끼며 등 뒤에서 나를 공격하는 놈의 턱을 발로 세게 까버린 후 나머지 놈의 배에 강하게 주먹을 박아 넣자 콜록거리며 두 놈 다 바닥으로 쓰러진다. 이 놈들 내가 태권도 유단자인 걸 몰랐나 보지......비록 지구력은 없지만..... 다섯 놈 중에 가장 약했던 놈에게 다가가 목을 지긋이 밟으면서 물었다. "너희한테 원한 산 기억은 없는데 누가 시켰냐?" ".............." 당장 털어놓을 줄 알았는데 의외다. 목을 밟고 있던 발에 더욱 힘을 주자 녀석이 괴로워하는 얼굴을 하며 콜록거리며 말한다. "우....연수." ................ 요즘 안 보인다 했더니..... 정말 질리지도 않고 날 긁어대는 구나 우연수. 널 어떻게 하면 좋을까? 응? 한참 기분 좋았었는데....그 놈 때문에 기분이 개판이다. 녀석이 이현을 좋아하는 건 알지만 나한테 왜 이러는지 도무지 이해가 안간다. 나한테 이런다고 무슨 해결이 나는 것도 아니고.... 하지만 네가 나에게 이렇게 같잖은 시비를 걸어올 때마다 한 가지는 확실하게 깨닫는다. 네 놈이 날 질투한다는 거.... 네 놈이 나라는 존재에 대해 불안감을 느낀다는 거... 그거 하나는 정말 확실하게 알겠다. 하지만 난 네 그런 치졸한 질투를 고스란히 받아줄 만큼 성격 좋은 놈이 아니란 걸 넌 진작 에 파악했어야 했어. 절대 백 만배로 갚아준다......우연수. 땅바닥에 굴러다니는 죄 없는 캔에게 괜한 화풀이를 하며 걷고 있는데 집 앞에 익숙한 분위기의 인영(人影)이 보였다. 두근. 두근. .................. 고맙다. 이소희. 한 발자국, 한 발자국 집 가까이 다가가자 땅바닥을 쳐다보고 있던 녀석이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고는 갑자기 얼굴을 찌푸린다. 왜 저러는 거지? 녀석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바로 앞까지 다가가자 이현은 차가운 손으로 내 얼굴을 더듬었다. 이 녀석 완전 손이 얼음장이잖아......대체 얼마나 기다린 거야? "누가 이런 거냐?" "응?" "네 얼굴.....누가 이랬냐고...." 아 그리고 보니 그 녀석들한테 얼굴 몇 대 맞았었지...... 그나저나 이 녀석이 이렇게 까지 인상을 찌푸리다니....왠지 기쁘다. "우연수가." "............." "너는.....그런 비실한 놈한테도 맞고 다니냐?" 이현의 얼굴이 더욱 찌푸려진다. 멋있는 척하며 녀석의 이름을 말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그러기엔 그 여우 놈이 너무 얄밉다. 치사하고 비겁한 방법이긴 하지만 너한테 가장 어울리는 방법으로 갚아 줄께. 우연수. 백만배로 갚아준다고 했지? "난 공부밖에 안 해서 샤프 정도 밖에 쥘 힘이 없거든.....나라고 맞고 싶어서 맞았겠냐?" 내가 한 말이지만 정말 토가 쏠리려고 한다. "................" "너.....그렇게 약한 것 같지는.......저 때 옥상에서도....." 이런....그 때 일을 깜빡했다. 도시락 때문에 열 받아서 우연수를 몇 대 쳤던 일이 있었지. "설마 내가 그 녀석 한명한테 당했겠냐?" "기억은 안 나지만 익숙한 얼굴이 몇 명 섞여 있더군...." "맷집도 없는데 얼마나 세게 때리던지.....간신히 도망쳐 나왔다." 그렇게 천연덕스럽게 말하면서 살짝 웃자 나를 쳐다보고 있던 이현이 갑자기 고개를 돌려버린다. 뭐야. 너 또 왜 그러는데? 녀석의 갑작스러운 태도변화에 발끈해서 녀석의 얼굴을 잡고 내 쪽으로 돌리자 세상에........녀석이 빨개진 얼굴을 하고 눈을 내려 깔고 있었다. 하얀 피부에 빨간 홍조를 띄고 긴 속눈썹을 파르르 떨며 눈을 내려깐 그 모습이 너무 사랑스러워서 나도 모르게 녀석에게 키스해버렸다. ".............." "너 귀엽다. 조이현." 녀석의 얼굴이 다시 확 하고 찌푸려진다. 요컨대 그런 말은 듣기 싫다는 거지.... 하지만 정말 귀여운 걸 어쩌냐. 그건 그렇고 어떻게 그 무심한 얼굴아래 저 사랑스러운 맨얼굴을 숨기고 있었을까? "내가 웃는 게 마음에 드냐?" ".......어........" "웃으면.....눈가에 점이 눈꼬리랑 같이 움직이니까......신기....해." 그렇게 말하면서 녀석은 점을 만지더니 조심스럽게 혀로 핥기 시작한다. 기분 좋긴 하지만 이거 누가 볼 까 무섭군.....녀석을 데리고 빨리 집안으로 들어가야 겠다고 생각하며 손을 잡아끄는데 이현은 도통 움직이려 하질 않는다. "그만 들어가자구....너 손이 얼음장 같아." "나 너 많이 좋아한다. 서준현." "그러니까 나랑 사귀자." 참 말이라는 것은 이상하다. 저렇게 짧은 데도 불구하고 수천수만 배로 확대되어 듣는 이의 마음에 잔잔하고도 깊은 파장을 일으킨다. 가장 듣고 싶었던 말을 가장 좋아하는 목소리로 듣게 되자 행복감이 파도처럼 전신으로 밀려온다. 마치 이 말을 듣기 위해 지금까지 살아왔던 것 같은 느낌..... "난 네 말대로 좀 소심하고...." 뭐야? 너 그 말 맘에 담아두고 있었냐? 그거 그냥 나오는 대로 말한 거라니까.... "말도 잘 못하고 그렇지만....." "더 이상 너에게서 날 지우지마라. 네가 그러니까 나 여기가 많이 아프다." 자신의 심장을 가리키며 솔직한 눈동자로 고백하는 녀석이 너무 사랑스러우면서도 감동적이다. ".....들어가자......감기 걸리겠다." "................" "알았으니까 들어가자고......" "내가 아주 따뜻하게 녹여 줄 테니깐....." 갈색의 눈동자가 약간 당황하는 표정을 짓더니 곧 짙은 욕망을 담기 시작한다. 열쇠를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우리는 서로 뒤엉켜 키스하기 시작했다. 마치 억눌러 왔던 감정을 한꺼번에 폭발시키는 것처럼.....순식간에 서로의 옷을 벗기고 맨살을 강하게 부비대며 서로의 감정을 아플 정도로 확인한다. 다리를 벌려 녀석의 것을 내 속 깊이 빨아들이자 이현은 낮고도 매력적인 신음소리를 내며 허리를 흔들면서 강하게 파고든다. 땀에 젖은 연한 갈색 머리카락이 가닥져 그의 거친 몸짓에 맞추어 투명한 땀방울을 흩뿌려 대며 나를 매혹시킨다. 엉덩이에 힘을 주며 녀석의 것을 꽉 조이자 이현은 탄성을 내뱉으며 몸을 떨더니 마침내 내 안에 따뜻한 정액을 뿌렸다. 뱃속으로 퍼져가는 그것은 너무나 따뜻했다. 언제나 그랬지만 섹스를 할 때면 마치 너와 완벽하게 하나가 되는 것 같아서 기쁘다. 손을 올려 내 몸 위로 무너져 내리는 녀석의 얼굴을 감싸자 이현은 한순간 아찔해 질 정도로 예쁜 눈웃음을 치더니 낮은 목소리로 속삭인다. ".......사. 랑. 해........" 小さな部屋にはあふれるほどの 작은 방에는 넘쳐날 정도의 過ぎた思い出達その姿は傷つく事恐れない 지난 추억들 그 모습은 상처입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아요 人の波に押されてるとあなたに出逢えた奇跡に感謝を... 사람의 파도에 밀릴 때면 당신과 만날 수 있었던 기적에 감사를 Ah神樣どうか奪わないで 아 신이시여 부디 빼앗지 말아요 #일상 버스를 타자마자 졸기 시작해서 아슬아슬하게 창문에 머리를 처박으려고 할 때 재빨리 손을 넣어 녀석의 머리를 보호했다. 준현은 부스스 잠에 취한 눈으로 나를 한번 쳐다보더니 다시 위험스럽게 고개를 끄떡거리며 졸기 시작한다. 이 녀석은 왜 버스만 타면 잘까? 처음에는 그렇게 꾸벅거리는 모습이 재밌어서 잠자코 보고 있었지만 도톰한 입술을 약간 벌린 채 눈가를 살짝 찡그리며 자고 있는 걸 보면 점점 키스하고 싶어서 참을 수가 없어진다. 계속 보고 있다가는 정말로 키스해버릴 것 같아서 한숨을 쉬며 녀석의 머리를 내 어깨에 기대게 하고 앞을 쳐다보자 여고생 두 명이 갑자기 고개를 확하고 돌린다. 설마 지금까지 계속 보고 있었던 건가? 기분이 나쁘다. 사실 서준현이 나에게 관심을 가지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도 못했다. 녀석은 나와는 다른 세계에 살고 있었고 비슷한 것이라고는 그저 주위에 대한 지독한 무관심뿐이었다. 동류(同類)인 것 같으면서도 이질적인 그 분위기에 가끔 눈이 가긴 했지만 녀석은 내게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하지만 처음으로 녀석과 눈이 마주쳤을 때 차가운 무관심과 타버릴 것 같은 열기를 동시에 담고 있는 그 기묘한 눈동자에 나도 모르게 끌려버렸다. 단정한 생김새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그 야한 점처럼 이상한 매력으로 나날이 나를 사로잡아가는 녀석....매끈해 보이는 옅은 갈색 피부에 잘빠진 다리....섹시한 엉덩이는 나의 욕망을 자극하며 이상한 열병을 전염시켰다. 그리고 얼마 후부터 녀석은 강하고 뜨거운 열기를 품은 솔직한 눈동자로 나를 녹여가기 시작했다.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는가 하면 가까이 다가왔다가 어느새 다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서 나른한 표정을 짓고 있는 이상한 녀석.....자신의 감정을 솔직히 내보이면서도 결코 내게 아무것도 강요하지 않는다. 단지 내 옆에서 기분 좋은 표정을 지을 뿐..... 생전 처음 먹어보는 맛있는 도시락과 기분 좋은 존재감에 나날이 중독 되어 가면서 언젠가 녀석이 나를 떠날 것이라는 생각에 점점 두려워졌다. 지금은 나를 봐주지만 이 매력적이고 아름다운 놈은 모두가 그랬듯 원래의 나를 알고 나면 결국 나에게서 떠나갈 것이다. 부모가 버린 고아에다..... 싸움이나 하고 다니는 양아치...... 솔직하지 못한 성격에 심각한 애정결핍............ 내게서 느끼는 욕정이 사라지면 미련 없이 이런 나를 떠나 버릴 거다. 그럼 나는 어떻게 될까? 아마 늘 그랬듯이 다시 처음의 그곳으로 돌아가 모든 것에 눈 돌리고 죽은 듯이 살아 갈거다. 아니 어쩌면 내 속에 숨어있는 지독한 집착이 살아나 녀석을 질려버리게 할지도 모른다. 어머니가 내게 질려버렸듯이.... 그렇게 되기 전에....내가 완전히 녀석에게 중독 되어버리기 전에 빨리 벗어나야 한다. 녀석에게서 지워지는 건 정말 끔찍하게 괴로운 일이였다. 준현이 나를 외면할 때마다 내 심장은 미칠 것 같이 죄어왔고 나를 향한 녀석의 완벽한 무관심이 내 혈관을 서서히 갉아먹기 시작했다. 서준현은 더 이상 나를 보지 않는다. 나는 더 이상 녀석에게 아무것도 아니다. 정말 완벽하게 녀석에게서 차단되어 간다. 버림받는다................................................. 어느새 난 누군가와 정신없이 싸우고 있었다. 녀석이 내게 준 정체를 알 수 없는 열기를 발산하며 피를 뿌리며....흥분하며...절망하며....그렇게 미쳐버릴 것 같은 내 스스로를 간신히 달래며 가슴이 뻥 뚫린 듯한 상실감에서 눈돌리려 했다. 하지만 결국 깨달아 버렸다. 아무리 노력해도 이제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예전처럼 모든 걸 덮어버리고 잊어버리고 아무것도 보지 않으면서 살 수는 없다는 것을...... 어느새 나는 녀석에서 완벽하게 중독되어 또는 완벽하게 길들어져버려서 이제 혼자서 아무렇지도 않게 살아갈 수가 없다. 서준현에게 내 존재가 부정되는 것이 내 삶의 의미 자체가 부정되는 것처럼 느껴져 도무지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버스가 심하게 흔들려서 잠에서 깼는지 준현이 잠에 취한 눈으로 나를 올려다본다. 짙고 긴 속눈썹으로 둘러싸인 검은 눈동자가 나를 향해 살짝 웃더니 곧 다시 스스르 속눈썹 속으로 사라진다. 녀석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쓸어 올리며 도톰한 귓볼을 만지자 준현이 입꼬리를 살짝 올리더니 모양 좋은 입술을 벌리고 말한다. "키스해줘." "............." 가끔씩 이런 녀석의 대담한 요구가 당황스러우면서도 기분이 좋다. 슬쩍 앞쪽을 쳐다보자 대부분은 자거나 딴생각을 하고 있고 아까의 그 거슬리는 여고생들도 수다를 떠느라 이 쪽을 보고 있는 것 같지 않다. 자석버스라 다행이군.... 대충 주변을 살피고 난 뒤 마음을 가다듬고 서서히 녀석의 입술로 가까이 다가가는 순간 준현이 입술 밖으로 붉은 혀를 내밀며 나를 유혹한다. 따뜻하고 까슬까슬한 녀석의 혀는 내 입술 위를 맴돌면서 촉촉한 타액을 듬뿍 묻히고는 다시 붉은 입술 안으로 쏙하고 사라진다. 내려깐 속눈썹 사이로 까만 눈동자가 희미하게 웃으며 나를 자극한다. 우리는 어느새 이 곳이 버스 안 이라는 것을 잊어버렸다. 따뜻하고 몰캉한 혀를 감았다 풀면서 녀석의 고른 치열을 핥자 준현은 마치 내 혀뿌리를 뽑아버릴 듯이 강하게 나를 빨아들인다. 어느새 완벽하게 키스에 열중해 버린 우리는 자석 깊이 몸을 묻으며 패팅까지 하기 시작했다. 준현의 바지 속으로 막 손을 넣으려는데 무언가 귀에 거슬리는 소리가 나서 쳐다보자 아까의 그 여고생 두 명이 핸드폰을 우리 쪽으로 향한 채 셔터를 눌려 대고 있었다. 젠장. 자리에서 일어나 다가가자 뻔뻔스럽게도 그 여자들은 당황한 눈치조차 보이지 않는다. "내놔." "싫은데요...." 빠직(--)+ "인터넷에 올리거나 하지 않을 테니까 좀 봐줘요....오빠들한텐 그냥 키스지만 우리한테는 일생동안 다시 만나지 못할 예술 작품이라구요." ".............." "이리 줘." "죽인다고 해도 싫어요." 아주 결연한 표정으로 주먹을 꼭 쥐고 말하는 여자애들을 보자 정말 기가 찬다. 이상한 여자애들.... 변태같이 남이 키스하는 건 왜 찍으며 또 그게 왜 예술작품이 된다 말인가? 말이 통하지 않을 것 같아서 손에 쥔 핸드폰을 강제로 뺏으려고 하자 그 여자애는 나를 무시무시한 힘으로 밀어내더니 마침 타이밍 좋게 열린 문으로 뛰어내린다. 뭐 저런 년들이 다 있어! 예상치 못한 사태에 어안이 벙벙해져서 그 자리에 멍하게 서있는 사이에 버스 문이 닫혀버렸다. 버스 밖에서 나를 향해 손을 흔들며 활짝 웃는 여자애들의 모습에 기가 막혀서 너털웃음까지 나온다. 눈 감으면 코 베어간다고 하더니........대한민국은 정말 무서운 나라다. 그렇게 홀려버린 듯 멍청하게 서있는데 준현이 어느새 옆으로 다가와서는 내 어깨를 툭 친다. 이런.....한심한 꼴을 보이고 말았다. 이 녀석에게는 가능한 가장 멋진 모습을 보이고 싶었는데 그깟 여자애들한테 핸드폰 하나 못 뺏고 멍청하게 서있는 모습을 보여 버리다니.... "다음에 내린다." "아...그래?" 별로 신경 쓰지 않는 건가? 그렇담 다행이지만...... ".............너....." "..응?" 두근. 눈을 가늘게 뜨고 나를 쳐다보는 눈초리가 심상치 않다. 역시 박력 없는 내 모습에 실망한건가? 제길....남자는 카리스만데...... 다른 녀석들에게는 잘만 통하는 나의 무표정이 유독 이 녀석에게만은 통하지 않는다. "왜 그렇게 멍한 얼굴이냐? 설마 아까 그 못난이들이 너한테 뭐라고 그래?" ".....?....." "혹시 너한테 수작 걸든?" "어?" "못생긴 주제에 감히 누구한테 수작 걸고 지랄이야........" "너도 그래....왜 그런 애들을 상대해 주냔 말이야....평소처럼 싹 무시해버리면 되잖아." 좀 핀트가 많이 어긋난 것 같다. 서준현. 그래도 난 네 그런 반응이 너무 기쁘지만.... "젠장....너 왜 이렇게 야시럽게 생긴 거냐. 조이현....다른 놈들처럼 여드름투성이 못생겼으면 좀 좋아....벌레들이 많이 꼬이니 정말 환장하겠다." "너는....내 얼굴.....마음에 들어?" ".............." 준현은 별 이상한 말도 다 듣겠다는 표정으로 쳐다보더니 피식 웃으며 내 어깨에 팔을 두르면서 귓가에 속삭인다. "그래......엄청 마음에 든다. 넌 거울도 안보고 사냐?" "............." "아무리......네 놈이 암만 반반하게 생겨먹었어도 이미 내꺼야. 알지?" 물론..... 엄마를 쏙 빼닮았다는 이유로 늘 아버지에게 얻어맞았던 이 얼굴을 네가 맘에 들어 해줄 줄은 정말 상상도 못했다. 그렇게 너는 아무렇지 않은 행동 하나하나로 나를 어두운 과거에서 끌어내준다. 버스에서 내려 한참을 걷자 고급스럽게 보이는 레스토랑이 나왔다. 가게 안쪽으로 들어가자 고급스럽고 아늑한 느낌을 자아내는 실내장식과 조용한 클래식 음악이 어울려 상당히 매력적인 느낌을 준다. "어머....준현이 네가 이 시간에 왠일이니?" 아.......순간 놀라버렸다. 가게 안쪽에서 화사해 보이는 중년의 여자분이 나오면서 준현을 보고 환하게 웃는다. 녀석과 똑같은 위치에 있는 점과 묘하게 섹시한 분위기.....녀석의 어머니다. "밥 먹으러 왔어." "그래? 근데 옆에 있는 잘생긴 애는 누구니? 설마 친구일 리는 없고....." "친구야." 준현의 대답에 녀석의 어머니는 상당히 놀란 얼굴을 하고는 내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본다. 저렇게 까지 노골적으로 쳐다보다니.....좀 민망하군. "준현이 네가 친구를 다 사귀다니.....정말 아닌 밤중에 홍두깨 같은 소리구나." "너 유치원 때부터 왕따였잖니?" "엄.마." "너 이름이 뭐니?" "조이현입니다." "그래.....우리 준현이 같이 이상한 애랑 친구라니....너도 좀 이상한 녀석이겠구나." ..........할말이 없다. "밥은 뭐 먹을래? 특별히 좋아하는 거라도 있니?" 화제 전환도 능수능란......준현과 매우 다르면서도 묘하게 같은 느낌에 약간 웃음이 나왔다. "아무거나 다 잘 먹습니다." 내 대답에 녀석의 어머니는 다시 뚫어져라 내 얼굴을 쳐다보더니 화사하게 웃으면서 말한다. 아......웃을 때 눈가의 점이 녀석과 같은 형태로 움직인다. "너 같은 아들을 낳은 걸 보니 너희 어머니도 나만큼 미인이신가 보네.." "주책 그만 떨고 밥이나 가져와 아줌마." 준현이 무둑뚝한 어조로 말하자 아주머니는 녀석을 향해 으르릉 거리며 낮은 위협을 가하더니 곧 주방으로 사라진다. 갑작스러운 이 만남이 왠지 유쾌하면서도 즐겁다. "왠지 너를 소개시켜 주고 싶더라." 한참을 걷고 있다 녀석이 먼저 침묵을 깨고 말했다. "나는.......네게 소개시켜 줄 어머니가 없는데....." "알아......." "그 대신.....내 어머니의 몫만큼 내가 널 사랑할거다." ".......그걸로 괜찮겠냐?" "............" ".............잠깐 기다려......나도 그에 어울리는 멋진 말을 생각하는 중이다." "................" "젠장.....갑자기 너무 감동 먹어서 생각이 안 나잖아." "무심한 놈이 왜 어울리지도 않게 사람 감동시키고 그러냐?" "................." "목 추워 보인다." 내 목에 두르고 있던 목도리를 풀어 준현에게 매어주고 있는데 갑자기 손위로 따뜻한 물이 툭하고 떨어진다. 올려다 본 녀석은 눈에는 투명한 눈물을 한가득 머금은 채 칠흙같이 까만 눈으로 나를 똑바로 쳐다보더니 또르르하고 구슬 같은 눈물을 떨어뜨린다. "울지마라. 얼굴 언다." 볼을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을 손으로 조심스럽게 닦아내자 녀석은 나를 세게 끌어당기더니 내 어깨위에 얼굴을 기대었다. 두꺼운 코트를 입었는데도 왠지 녀석의 따뜻한 눈물이 어깨까지 베어드는 듯 하다. 한참을 그러고 있자 여기저기서 우리를 힐끔거리며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진다. 경멸에 찬 시선..... 호기심을 담고 있는 시선..... 그리고 무관심한 시선.... 저것이 앞으로 우리가 살아나가야 할 현실이다. 아무리 저들이 차가운 경멸과 삐뚤어진 편견, 혹은 단순한 치기어린 호기심으로 우리를 상처 입힌다 하더라도 나는 과거의 나처럼 그 모든 것에서 도망치거나 외면하지 않을거다. 지금처럼 이렇게 따뜻한 너와 온기를 나누면서 당당하고 행복하게 살아갈거다. 오랫동안 가지고 싶었던 내 가족을.....내 사랑을.....내 삶의 의미를 이제야 찾았으니까.. "사. 랑. 한. 다. 조이현." "알고 있지?" "어..." 내 연인은 뜨거운 정열과 함께 찾아와 딱딱한 껍질 속에 굳어져 있던 날 녹이고 그 열기로 나를 불태웠다. 2003. 12. 20 [퍼옴/타쿠] 냉정과 열정사이(쟈스민티 외전) 下 Blue......냉정 사랑하는 이에 대한 냉정은 이성의 마지막 편린이며 심장을 찢는 최고의 배려이다. 만나고 싶은 마음이 한숨으로 녹아내리고 그리운 사람은 추억의 그대로... 지울 수 없는 사모의 마음은 미련의 아픔을 남기고 꿈의 어딘가로 사라지네요. 시간은 나만 남겨두고 흘러가네. 그때부터 몇 번인가의 사랑도 했어요. 하지만 따스한 밤도 이별의 아침도 당신의 것보다 더할 순 없네요. 하얗게 흐려진 그 정열, 사랑했던 만큼 약해져요. 요구되던 남자다움과 문득 엿보이던 여자다움이...... 가슴에 다가온 단 한번의 사랑 당신만이 언제나 언제까지나 나의 이정표..... #아픔 "소희 왔구나....오랜만이다. 이리 와서 앉아라." 가게에 들어서자 지후선배가 희미한 웃음기를 띄며 술잔을 흔들면서 내게 인사한다. 이 사람은 어떻게 시간이 갈수록 매력적일까? 6년의 시간은 그에게 많은 변화를 가져다주었다. 특유의 차가운 분위기는 여전했지만 고등학교 때와 달리 시릴 정도로 서늘하지 않고 종종 숨막힐 정도로 섹시하고 매력적인 눈웃음을 지으며 사람들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물론 성재형에게도 예외는 아니겠지..... 좋은 사람이지만 내 입장에서는 역시 반갑지 않다. 이 사람 앞에 있으면 내가 너무 작아져 버리니깐.....이 사람과 날 비교해 버리게 되니깐.......치졸한 질투의 감정이 서서히 머릿속의 이성을 침식시켜간다. "선배.....좋은 회사에 취직 하셨다구요...축하드려요...." "고맙다....넌 여전히 싹싹하구나....." 그렇게 말하면서 지후선배는 살짝 웃으며 내 머리를 쓱쓱 쓰다듬는다. 그 부드러운 손길이 싫지가 않은 것이.... 도저히 당해낼 수 없는 연적인데도....나는 이 사람을 꽤 좋아하는 것 같다. 그래서 당신하고 만나는 것이 꺼려지는 지도...... 모순.........당신은 끝없이 나를 괴롭히는 수많은 모순점들 중 하나.... 이성과 감정. 억제 할 수 없는 열정과 유지되어야만 하는 냉정. 상대에 대한 배려와 나의 이기심속에 나는 끝없이 갈등하며 그래도 매번 이성의 자락을 놓지 않는다. 二人の距離が近くて見えなかったまま長い事來たの. 두사람의 거리가 가까워서 보지 못한 채 오랫동안 와버렸지.. 出逢った日が昨日にも思えるよ 처음 만났을 때가 어제일처럼 뚜렷해 "이소희.....너 애인 생겼냐? 요즘 왜 이렇게 뜸하냐?" 성재 형이 푸짐하게 보이는 안주를 내려놓으며 내게 푸념하듯 말한다. "시험 기간이었거든요......." 가게에 들어오진 않았지만 사실 매일 이곳에 왔었다. 혹시라도 우연히 담배를 피러 나온 형과 마주칠까봐 한참을 가게 앞에서 서성이다 결국 그냥 가버리긴 했지만.... "하긴....너야 뭐든 열심히 하는 놈이니까...." "이지후....이 놈이 너보다 좋은 대학 간 거 아냐?" "내 후배 놈 중에 이렇게 성공한 건 이 놈밖에 없을 거다. 자랑스러운 놈....." 성재형은 정말 기쁜 얼굴을 하면서 내 어깨위에 손을 올리곤 내가 마시던 버드와이저에 입을 댄다. 두근. 두근. 두근. 성재 형이 병입구에 입술을 대자 내 입술에 갑자기 열기가 올라와 마치 화상을 입은 듯 뜨거워진다. 황홀하고 자극적인 간접 키스...... "미친놈.....일하면서 술은 왜마시냐?" "흥. 내가 사장인데 못 마실 거 뭐있냐? 원 없이 술 마시고 싶어서 가게 하는 거 모르냐?" "근데 그 재수탱이 이도진은 왜 안보이냐?" "출품전 준비 때문에 바빠......나도 슬슬 가봐야겠다. 계산서나 줘...." "그래라." "................" "유성재.....친군데 어째 서비스 하나 없냐? 싸가지 없는 새끼." 계산서를 받은 지후 선배가 약간 얼굴을 찌푸리면서 불만스럽게 말하자 성재형은 특유의 유들유들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장사에 친구 따지는 거 봤냐? 어쨌든 매번 비싼 거 팔아줘서 고맙다." 지후 선배는 인상을 쓰며 술값을 계산하고는 정장 자켓을 걸치며 느릿하게 자리에서 일어선다. "다신 오나 봐라." "크크크...잘가라 친구야....." 성재형이 마시던 버드와이저를 입에 대자 병에 남아있던 입술의 온기가 따뜻하게 내 입술로 전해져 온다. "소희 너 오늘 시간 괜찮지?" "예." "오랜만에 왔으니까 빨리 문 닫고 술이나 마시자." 모르는 사람이 보면 성재형이 지후선배를 사랑하는 건 아무도 모를 것이다. 형은 지금까지 몇 명의 여자친구가 있었고 또 나름대로 그녀들을 아꼈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형의 방식이다. 나처럼 집착하며 그 사람을 붙들고 있는 것이 아니라 애써 지우려고 하지도 집착하지도 않고 가만히 마음속 깊이 그 사람을 묻어두고 천천히 그 사랑을 희석시켜가는 것.... 그리고 다른 사람의 마음을 받아들이고 아낄 줄 아는... 상대가 절대로 부담스럽지 않도록..... 또한 자신이 그 사랑해 질식해 버리지 않도록...... 가장 자유로운 형태로 자신의 사랑을 지켜간다. 내가 반해버린 정말로 멋진 사람... 하지만 나는 스스로가 그 정도로 만족할 수 없는 욕심쟁이 인 것을 알고 또한 당신이 나를 너무나 아끼는 것을 알기에 오늘도 힘겹게 이성의 편린을 붙잡은 채 놓지 않는다. あなたを守るその爲に今僕が出來る飾らない約束を 당신을 지킨다는 그것만을 위해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꾸밈없는 약속을 この氣持ちを愛と呼んで Let's get together 이 마음을 사랑 이라하고 Let's get together #만남 그를 만난 건 내가 서울의 학교로 전학 온 첫날이었다. 그때는 이상기후로 인해 3월초인데도 연분홍의 벚꽃이 가지가 휘어질 정도로 피어있었고 나는 그 아름다운 벚꽃 나무 아래에 앉아 떨어지는 꽃잎을 바라보며 새로운 학교에 대한 감상에 꽤 들떠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마도 그런 흥분 상태에서 만났기 때문에 그가 더욱 인상이 깊었는지 모르겠다. 한참을 그렇게 떨어지는 벚꽃을 바라보고 있는데 꽤 불량스럽게 보이는 놈들이 나에게 다가와 말도 안되는 시비를 걸었다. 또래에 비교해서 큰 덩치 때문에 별 같잖은 인간들의 시비에 언제나 시달려 왔었고 그것에 익숙해져있었던 나는 그날도 언제나처럼 그 놈들을 친절하게 밟아주었다. 선배랍시고 거들먹대던 그들은 우습게도 내게 밟히는 내내 이를 갈며 구세주처럼 누군가의 이름을 들먹거리며 나를 위협했다. 유치한 놈들.... 바닥에 널부러져 있는 녀석들에게 침을 뱉어주고 돌아서는 순간 나를 쳐다보고 있는 강한 시선과 마주쳤다. "야~너 제법이다." 그 사람은 담배를 입에 물고 빙글빙글 돌리며 웃음기 띈 얼굴로 나를 바라보며 마치 오랜만에 만난 친구에게 말을 걸 듯 그렇게 나에게 말을 걸었다. "..............." 내 대답이 없는데도 그는 전혀 기분이 상하지 않는지 여전히 웃음기를 머금은 얼굴로 나에게 다가오더니 갑자기 널부러져 있는 녀석들의 복부를 세게 걷어차기 시작했다. 의외의 상황전개에 멍해져 있는데 두들겨 맞던 놈들이 귀에 익숙한 이름을 내뱉는다. 퍼억. 퍼억. 퍼억. "악! 유성재.....그만......" 유성재....내게 터지면서 녀석들이 마치 구세주처럼 불렀던 이름...... 저 사람은 왜 내가 아니라 저 녀석들을 때리는 거지? 그의 이상한 행동에 의문을 느끼고 있는데 한참 녀석들을 발로 굴려대던 그가 행동을 멈추더니 나에게 다가와서 담배를 내밀며 친근하게 웃는다. "오해하지 마라....저놈들 내 친구 아니다." "그래요?" "당근이지.....저런 멍청이 들이 이 나랑 친구일 리 있냐?" 나는 그 당시 담배를 피지 않았지만(당연하지. 그때 난 중2였다.) 그가 내미는 호의를 거절하고 싶지 않아서 빨갛게 타들어가는 담배를 입에 물고 연기를 빨아들였다. "콜록, 콜록, 콜록," 담배의 매운 연기가 목구멍을 자극하자 쉴새없이 기침과 함께 눈물이 나온다. 젠장 이런 걸 왜 피우는 거야? 소매 끝으로 눈물을 닦아내며 인상을 찌푸리는데 옆에서 그가 비웃는 소리가 들린다. "큿큿큿...너 무지 귀엽구나?" 뭐? 한번도 들어 본 적이 없는 생소한 소리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쳐다보는데 그 순간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 새끼들.....머리에 피도 안마른 것들이 어디서 담배피고 지랄이야......." 벗겨진 대머리를 옆머리를 이용해 교묘히 가린 느글거리는 표정을 한 중년의 남자가 씩씩거리면서 우리에게 다가온다. "씨발....똥 밟았다." 그는 잔뜩 인상을 찌푸리면서 욕을 내뱉으며 피고 있던 담배를 재빨리 비벼끈다. 분위기를 보아하니 선생이군.....이후에 일어나는 사태에 대해 약간의 곤란함을 느끼고 있는데 선생으로 보이는 사람이 다가와 갑자기 그의 싸대기를 날린다. "유성재.....너 이새끼......정학에서 풀린지 얼마 됐다고 또 개지랄이냐? 쓰레기 같은 놈." "................" 나 따위는 아예 안중에 없다는 듯 그 선생은 얼굴을 시뻘겋게 붉힌 채 그만을 쳐다보며 쌍욕을 한다. 아무리 학생이 잘못했다고 하지만, 선생이라면서 어떻게 저런 말을 할 수가 있지? 유성재라는 사람은 그런 상황에 매우 익숙한지 여유있는 표정 아니 어째보면 뭔가를 비웃고 있는 듯한 표정으로 발광하는 선생을 아주 우습다는 듯이 내려다본다. 그리고 그 표정에 열받은 선생이 또다시 손을 들어 유성재 라는 사람의 얼굴을 내리치려 할때 나도 모르게 순간적으로 나간 팔이 그 선생의 팔을 붙잡았다. "그만 하세요." "이 새끼, 너는 또 뭐야? " 선생은 분노에 가득한 얼굴로 나를 노려본다. "보시다시피 이 학교 학생인데요." 나의 행동이 그 선생을 더욱 화나게 했는지 우리는 교무실에 끌려갔고 그 꼰대 선생에게 엄청나게 깨진 후 결국 그와 난 정학판정을 받게 되었다. 전학 오자마자 정학이라니....엄마가 알면 얼마나 놀랄까? 불량학생들만 맞는다는 정학을 설마 내가 맞을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매우 충격적이고 절망적이어야 할 이 상황이 그다지 무겁게 느껴지지 않는다. 들키면 엄마한테 무지 혼날 테지만 난 정학이라는 상황보다 내 옆에 있는 사람의 존재가 더 신경이 쓰였다. 교무실에서 열나게 선생에게 두들겨 맞고 있을 때 그는 선생이 내 이름을 내뱉자마자 벽까지 긁으면서 깔깔거리며 웃었다. 내 이름이 나와 안 어울리는 건 알지만 그렇게 노골적으로 웃는 사람은 정말 처음 봤다. 덕분에 선생한테 더 얻어 터졌지만..... 얻어터진 엉덩이가 불이라도 붙은 듯 화끈거리며 욱신욱신 쑤셔온다. "소희야....." "네." "크크큭..." 벌써 4번째다. 그가 내 이름을 부르며 큭큭거리는 것이...... 다른 사람 같았으면 상당히 불쾌하게 느껴졌을 행동이 이상하게도 전혀 불쾌하지 않다. 아니 오히려 그가 내 이름을 불러주는 것이 상당히 기분이 좋다. 그 낮고 허스키한 목소리가 가져다주는 깊은 여운이 나를 기분 좋게 감싼다. "이소희...." "네." 또 웃는가 했더니 그는 짙은 갈색눈동자에 장난기를 가득 담은 채 내게 말한다. "사이좋게 정학까지 맞았는데 같이 안 놀래?" 솔직하고 자유로운 눈동자가 웃음기를 머금고 내 마음을 휘감는다. 정신없이 휘날리는 아름다운 벚꽃이 부드러운 바람을 타고 팔랑 팔랑 연분홍의 꽃비를 흩뿌리며 우리의 머리위로 떨어진다. 손을 내밀자 앙증맞은 연분홍의 몇 개 손바닥 위로 떨어지더니 다시 바람을 타고 흩어져 간다. 갑자기 날아간 벚꽃에 소원을 빌고 싶어졌다. "좋아요." 내 대답에 그는 시원스럽게 웃더니 내 어깨에 팔을 두르면서 유쾌한 목소리로 말한다. "너 마음에 들었다. 앞으로 내 꼬봉 시켜줄게." "꼬봉요?" "왜? 꼬봉 말고 나랑 친구해 먹고 싶냐?" "가능하다면요...." 그는 내 말에 아무런 대답 없이 나를 쳐다보더니 한번 피식 웃고는 핸드폰을 꺼내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야. 이지후.....좀 나와라." "꽤 귀여운 놈을 발견했거든......소개시켜줄게." 꽤 귀여운 놈이라......생소한 지시 대명사다. "뭐? 수업중이라 못나온다고?" "너는 친구가 정학을 당했는데 거기 앉아서 공부하고 싶냐?" 삐졌는지 입술을 불퉁하게 내밀곤 미간을 찡그리는 모습이...........이상하게........귀엽다. "씨바.....그래 잘 먹고 잘 살아라." 그는 거칠게 전화를 끊더니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나를 쳐다보며 따라오라고 손짓한다. 그를 따라 폐품 창고 같은 곳으로 들어가자 까만색의 잘빠진 바이크가 놓여져 있다. "타라. 지후 놈 곧 올거야." 그 사람 안온다고 하지 않았었나? 내 생각이 얼굴에 드러났는지 그는 다시 유들유들한 미소를 띄우며 말했다. "지금 그 놈 궁시렁 거리면서 가방 싸는 중 일걸~쌀쌀맞아 보여도 나한텐 무지 약하거든." "..........많이 친한가 보죠?" 정말로 기쁜 듯이 말하는 그의 표정에 가슴한 곳이 미미하게 욱신거린다. "내 유일한 친구 놈이다." 욱신. '유일한'이라는 말에 심장 언저리가 다시 따끔거린다. "그래서 친구는 안돼. 아끼는 동생이라면 몰라도....." 흘려들으면 대수롭지 않은 말이지만 왠지 그가 그은 경계 밖으로 밀려난 느낌에 서글퍼졌다. 기분 탓이겠지. 단지 그가 나보다 나이가 많기 때문에 친구는 곤란하다고 말하는 걸 거야. 가슴 한쪽이 시리는 것을 애써 외면하며 그의 뒤에 올라타려는 순간 창고의 문이 열리며 한 사람이 나타났다. "야~이지후. 생각보다 빨리 왔네..." "미친놈.....왜 수업 중에 불러내고 지랄이냐? 너 때문에 담탱이한테 또 찍혔다." 그 사람은 그렇게 투덜거리며 천천히 우리에게 다가왔다. 숨결이 거칠어져 있는 것이 뛰어온 모양이다. 가까이에서 본 그 사람은 서늘한 분위기를 풍기는 깔끔한 미남형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차가운 분위기와 다정함을 들어있는 무뚝뚝한 말투는 언밸런스한 느낌을 자아내며 이상하게도 내 시선을 끈다. 나는 그날 처음으로 바이크를 그것도 위험하게 세 명이서 타고 나이트라고 하는 곳에 가서 토할 때까지 술도 엄청 마셔봤다. 알지 못하는 세계.... 하지만 미칠 정도로 매력적인 곳..... 그것은 내가 그동안 맛보지 못했기 때문에 금지되어 있는 세계였기 때문에 느끼는 황홀감 아니라 그와 함께 있기 때문에 느끼는 황홀감이라는 것을 깨달은 건 그 후 얼마 되지 않아서 였다. 그래............ 그 날은 나의 사랑하는 사람과 연적을 동시에 만난 아름다운 벚꽃이 휘날리는 9년 전의 어느 봄날 이었다. #연심 "소희야. 수업 끝났어?" "어..." 현빈이가 귀엽게 웃으며 말을 걸어온다. 그와 동시에 나에게 쏟아지는 무수한 원망의 시선들.....그러고 보니 이녀석 인기가 많았지.... "오늘 시간 괜찮으면 나랑 같이 CD사러 가지 않을래?" 별 약속은 없지만 성재형 가게에 가볼까 했는데... 아냐 일주일 전에 갔으니까 오늘 또 가면 부자연스러울지도.... "그래." 내가 대답하자 현빈이는 귀엽게 웃으며 내 팔짱을 낀다. 그 순간 살기로 변한 강한 시선들이 내 등 뒤를 아프도록 후벼 판다. 이러면 다른 사람들이 오해할 텐데....웃는 낯에 침 뱉을 수 없듯이 생글거리며 웃는 현빈이에게 차마 팔 빼라는 말이 나오지 않는다. "언제나 생각하지만 소희 넌 굉장히 다정한 것 같애." "그래?" 어떻게 하면 자연스럽게 팔을 풀까라고 고민하면서 적당히 대답하자 현빈이가 더욱 팔을 바짝 끼면서 다시 말을 잇는다. 이거 정말 곤란하다. "응....." "지금도 무척 곤란한 주제에 내가 민망할 까봐 봐주고 있는 거잖아. 난 네 그런면이 좋아." "................" 현빈이를 보니 여자라는 존재가 좀 무서워진다. 게다가 저 노골적인 스트레이트성 발언...... 자신의 감정에 너무나 솔직하고 당당한 그녀가 조금 부럽기도 하다. CD 판매점에서 이것저것 음악을 들으며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정말 생각지도 않은 사람을 만났다. 부드러워 보이는 엷은 적갈색 머리카락에 단정하면서도 묘한 느낌을 자아내는 하얀 얼굴선......무심한 듯한 분위기......그리고 시선을 잡아끄는 강한 매력. 내게 호감과 질투를 동시에 느끼게 하는 그와 닮았으면서도 다른 느낌을 자아내는 사람. "안녕하세요...오랜만이네요. 도진 선배." "어..." 내 등장을 전혀 예상치 못했을 텐데 그는 언제나의 기억처럼 무표정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본다. 그러다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하더니 부시럭거리며 바지 주머니에서 종이 비슷한 것을 꺼내 내게 내밀고는 말없이 쳐다본다. "아....전시회 티켓이네요." "준비중이라고 이야기는 들었는데....이거 저 주시는 거예요?" "어..." "고맙습니다. 꼭 가볼께요." 내 손에 쥐여진 약간 구겨진 2장의 티켓을 보며 웃으며 말하자 도진 선배는 역시 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힐끗 쳐다보더니 곧 고개를 돌리고 침착하게 CD를 고른 후 계산대에서 계산을 하고 가게에서 나갔다. 나가기 전에 한번은 쳐다볼 줄 알았는데 아마도 저 선배에게 난 관심 밖의 영역인가 보다. 도진선배에게서 받은 티켓을 주머니에 넣고 헤드폰을 쓰고 다시 음악을 들으려는데 CD몇 장을 손에 든 현빈이가 다가와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나에게 묻는다. "방금 그 사람 누구야? " "고등학교 선배." "그래? 그런 미남은 오랜만에 보네......네 주위에 있는 사람은 정말 하나같이 멋지구나." "..............." "호프집하는 그 선배도 꽤 멋졌잖아." ".............." 성재형.....갑자기 성재형이 보고 싶다.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느끼는 충동이지만 도진 선배를 만나서 그런지 만나고 싶다는 욕구가 한층 강하게 나를 휘젓는다. "하긴 잘난 사람 주위엔 잘난 사람들만 모이니깐..." "그래도 내 눈엔 소희 네가 제일 멋지게 보여." "....고맙다......" "현빈아. 근데 나 가볼 데가 생각났는데....." "어디?" "아....저기 그게 성재형 가게에 가볼까 하고......" "성재형? 혹시 그 호프집 하는 고등학교 선배?" "어...." "그럼 나도 같이 데려가 줘.....응?" 현빈이는 오늘 나를 곤란하게 만들려고 작정한 것 같다. 애교 섞인 목소리를 애써 무시하면서 완곡한 거절의 말을 꺼내려는 순간 내 머릿속에 간사한 생각이 스쳐지나 간다. "좋아.....같이 가자." "정말? 같이 가도 돼?" "응..." 성재형에게 나는 과연 어떤 존재일까? 형이 나를 진심으로 아끼고 또 소중한 존재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은 안다. 하지만 나는 이제 더 이상 그 것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게 되었다. 예뻐하는 동생으로 남아 있기엔 내 마음은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그를 원한다. 갑자기 형에게 내가 어떤 존재인지 시험해 보고 싶어졌다. "요즘 수상하다 했더니.....정말로 연애하고 있었던거냐?" 현빈이가 화장실에 간 사이 비어있는 접시를 치우면서 성재형이 묻는다. "..............." "형이 보기엔 어때요?" 다행히 목소리는 떨고 있지 않군. 희미하게 건 희망이 절망으로 변해 산산이 부서질까 두려워 진다. 아주 조금이라도 좋으니 제발 불쾌한 얼굴을 해줬으면..... "흠~네가 아깝긴 하지만.....뭐 저 정도면 괜찮지 않냐?" "네가 저런 타입을 좋아할 줄은 몰랐지만......" ".............." "형은 제가 어떤 타입을 좋아할 거라고 생각했는데요?" 내 물음에 성재형은 미간을 약간 찌푸리고 잠깐 생각하더니 평온한 어조로 말을 잊는다. "글쎄, 굳이 말하자면........강한 느낌의 사람?" "저렇게 애교가 철철 넘치는 타입이 아니라..." "말이 없으면서 단아한 미인을 좋아할 줄 알았는데....좀 의외이긴 하다." "..............." "형 맘에 들지 않으면 사귀지 않을께요." "........." "너 그게 무슨 말이냐? 내 맘에 들건 안들 건 무슨 상관이냐? 네가 좋으면 되는거지..." 상식적으로 생각해서 말도 안되는 소리라는 걸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럼 형은 제가 현빈이랑 사귀었으면 좋겠어요?" 왜 하필이면 현빈이를 여기에 데리고 왔을까? 형이 싫어하는 입이 거칠고 성격 나쁜 천한 여자를 데려올걸..... 그러면 당장 사귀지 말라고 말해줄 텐데..... "오늘 너 좀 이상하다. 이소희." "내게 무슨 말을 듣고 싶은지 모르겠지만........" "그런 문제는 네 스스로 생각해서 결정할 문제지 남의 말에 좌지우지 될 성질의 것이 아니다. 싫으면 깨끗이 헤어지고 느낌이 좋으면 사귀는 거다......보통은....." "뭐...인생선배로서 내 의견을 굳이 듣고 싶다면....." "꽤 귀여운 애인 것 같으니까 잘 해봐라는 정도?" 마지막으로 걸어본 부질없는 희망이 산산이 부셔져 내리며 심장을 갈갈이 찢어 놓는다. 성재형의 웃는 얼굴이 담담한 목소리가 달콤한 독이 되어 나를 해친다. 가슴에서 뜨거운 덩어리가 울컥하고 올라오며 눈시울이 뜨거워져서 나는 더 이상 그곳에 있을 수 없었다. "저 먼저 가니까 현빈이 보고 미안하다고 전해줘요...형." 그렇게 말하고 나는 가게에서 뛰쳐나왔다. 뭘 확인하고 싶었던 거냐? 이소희. 새삼스레 그가 질투라도 해주길 바랬던 거냐? 직접 다가가지 않고 간사한 꾀를 부린 대가를 잘도 치루는 군. 차라리 형이 나를 그렇게 아껴주지 않았다면 내 이 터질 것 같은 감정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나는 예전에 당신에게 내 마음을 고백해 버렸을 거다. 그리고 형의 상처를 치료해 주려 했겠지. 하지만 나는 당신이 아직도 그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그런 깊은 아픔과 고독을 안고 있는 당신에게 차마 내 감정의 무게까지 보탤 수는 없다. 그냥 가끔 이렇게 기대하다 실망해버리는 것을 반복하며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스스로 확인할 뿐...... 그래도 난 형이 내게 철없는 소유욕이라도 보여주길 바랬었다. 나를 강한 힘으로 속박해 주길 정말 간절히 바랬었어. 말도 안되는 억지 물음 속에 담겨져 있는 나의 진심을. 조금이라도 눈치 채 주길 바랬었다. 당신의 향기로 흔들리는 이 마음 죄 많은 달에 비춰진 오늘 저녁이라도 부디 연약함을 용서해주세요. sorry my love. 두 번 다신 돌아오지 않는 시간이여. 오늘 밤만은 어리식음이 밤바람에 절실히 느껴집니다. 꿈을 쫒는 사람에게 머물 곳은 없는데 무엇을 구하며 헤메이는 것인지. 모든 것을 떨쳐버리고 가슴을 맞대고 별의 아래에서 춤추고 싶네요. 하얗게 흐려진 그 정열, 사랑했던 만큼 약해져가요. 저무는 해에 사랑을 겹쳐서 떠오르는 아침 해에 인생을 보았어요. 너무나도 다정한 그 말투, 날 이해하는 것처럼 비웃지 마세요. *GLAY -逢いたい氣持 (만나고 싶은 마음) #부화(孵化) 가게에서 나와 벌써 몇 시간이나 정신없이 걷고 있다. 성재형.....많이 당황했겠지? 얼마나 걸었는지 벌써 명동 근처까지 와버린 것 같다. 피곤에 지친 다리가 천근 같이 무겁다. 어디 좀 앉아야겠군. 근처에 있는 맥도날드에 들어가 코코아 한잔을 시키고 멍하게 창문을 내다보니 창밖으로 커플들이 팔짱를 끼고 다정하게 지나가고 있는 것이 보인다. 나도 저 평범한 군중들 속에 묻혀 거리를 거닐었으면.....사랑하는 사람을 바라보며 가끔은 가벼운 스킨쉽도 하고.... 저 사람들은 어떻게 서로가 운명임을 알아보았을까? 아니.....운명이 아니더라도 저 수많은 사람들 속에서 어떻게 서로 마주보게 되었을까? 한쪽만을 향하지 않고 또는 다른 방향을 향하지 않고 마치 교차점에 서서 바라보듯이 정확히 서로를 향해 사랑이라는 감정을 느끼는 그들이 무척 부러우면서도 신기하다. 한동안 그렇게 창밖을 보며 시간을 죽이다 마음을 다잡고 다시 내가 있을 자리로 돌아가기 위해 일어서는데 주머니 속에서 무언가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XXX 화백 작품 전시회 신문에서 꽤 자주 볼 수 있는 유명한 화가의 이름....... 이 사람이 도진선배 대학교 때 교수라고 했지...이런 유명한 사람의 전시회에 같이 작품을 내다니 도진 선배도 상당한 실력인가 보다. 위치를 보니 여기서 걸어서 20분 정도의 거리군. 지금쯤 마치지 않았을라나... 도진 선배와 특별이 친분은 없었지만 누군가의 온기가 마냥 그리워져서 티켓을 쥐고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다행히 아직 문닫지는 않았지만 역시 늦어버렸는지 별로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꽤 규모가 큰 전시관 안쪽으로 들어가자 여러 형태의 그림들이 나란히 걸려있다. 유명한 사람의 전시회라고 해서 굉장한 그림이 있을 줄 알았더니....아무리 뚫어지게 바라보아도 전혀 의미를 알 수 없는 그림이 있는 반면 색채가 아름다운 풍경화나 나도 그릴 수 있을 정도로 상당히 단순해 보이는 그림도 있었다. 그렇게 한 작품 한 작품 가벼운 마음으로 감상하며 지나치다 나도 모르게 어떤 그림 앞에 우뚝 서버렸다. 붉은 색과 푸른색의 묘한 대비속에 시리게 차가우면서도 아름다운 아니....어떻게 보면 뜨거우면서도 묘하게 관능적인 단정한 외모의 남자가 나른한 눈동자를 하고 이 쪽 세상을 바라보고 있었다. 살아있는 그의 밤하늘 빛의 검은 눈동자는 충만감. 욕망. 정열. 파괴. 차단.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는 무수한 감정의 파편들을 하나의 거대한 덩어리의 형태로 내뿜으며 한순간에 나의 가슴을 꿰뚫으며 강렬함을 선사했다. 부드러우면서 강렬한 터치와 미묘하게 다른 보색들이 자아내는 신비하고 화려한 분위기, 색감 하나하나가 모두 하나가 되어 그라는 인간 자체를 이루고 있는 것이 느껴진다. 부제: Destiny 작자: 이도진 나도 모르게 그림을 향해 손을 뻗어 가만히 거칠거칠한 물감의 촉감을 만지자 그를 처음 만났을 때 느낌이 희미하게 하나둘 가슴 속에서 살아난다. 어떻게 이렇게 완벽하게 한 사람을 표현해 낼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이렇게 완벽하게 서로 사랑할 수 있지? "오늘 올 줄은 몰랐는데..." 뒤를 돌아보자 도진 선배가 깔끔한 정장을 입고 양손에 꽃다발이 가득 찬 종이가방을 들고 나를 쳐다보고 있다. "좋은 그림이네요. 선배." ".........그래?" "네......그림 볼 줄은 모르지만 이 그림을 보고 있으니 왠지 가슴이 두근거리네요." "............" "........굉장히 감동적이에요." "..........고맙다......." ".....그래도......" "너처럼 우는 사람은 처음 봤는데......." 그렇게 말하며 도진 선배는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어 내게 건내 준다. 어느새 의지를 배반하고 나와 버린 주책스러운 눈물을 거칠게 닦고 있는데 손수건에서 희미한 꽃향기가 난다. 지후 선배에게 늘 배여 있는 희미하고도 매력적인 꽃향기......이 사람의 체취였던가? "마셔라." 도진 선배가 자판기에서 뽑아준 네스티를 볼에 대자 차가운 감촉이 기분 좋게 전해져 온다. 선배는 한동안 말없이 서 있더니 곧 내 옆으로 다가와 털썩 앉으며 담배 한개피를 꺼내 불을 붙였다. 이 사람은 정말 행동 하나 하나가 그림 같구나. "저기.....지후선배와는 어떻게 해서 사귀게 됐나요?" "................." 무서울 정도로 고요한 정적이 흐른다. 흘낏 보여 지는 지독한 무표정한 옆모습에 내 입이 원망스러워진다. 바보 같은 이소희....이 사람한테 그런 걸 물으면 어떻게 해? "아...저 죄송합니다. 주제 넘는 걸 물었어요...." 어떻게든 이 얼어붙을 것 같은 분위기를 수습해 보려고 간신히 말을 꺼내었건만 도진 선배의 얼굴에는 도무지 표정의 변화라고는 찾아볼 수 없다. 어떻하지? "꼬셨다." "네?" 침묵을 깨고 나온 엉뚱한 말은 나를 상당히 당황시켰다. 꼬시다니.....선배가 지후선배를? 이 무표정하고 뻣뻣하기 이를데없는 사람이......설마...... "맞아. 내가 먼저 꼬셨어. 녀석이 욕구불만에 시달릴 때까지 페르몬을 줄줄 흘리고 다녔지." 담배연기를 뱉어내며 건조한 어조로 말하면서 입꼬리를 끌어올리고 희미하게 웃는 도진 선배가 순간 상당히 섹시하게 보였다. 과연....저런 모습을 보니 아까까지 절대 믿어지지 않았던 얘기에 상당한 타당성이 느껴진다. "....하아.....직방이었겠네요." "뭐....나름대로....효과는 있었지." 무엇을 생각하는지 선배의 입꼬리가 한층 더 올라가자 볼에 살짝 보조개가 패인다. 표정 없는 사람이 저런 표정을 짓다니....상당히 즐거운 일이라도 생각하나 보다. "......그 방법은 제게 무리겠지요...." "응." 울컥..... 무심한 사람인 줄은 알고 있었지만 한순간도 망설이지 않고 대답해 오는 것이 왠지 열받는다. 내가 그렇게 섹시한 구석이 없나? 아니 없다고 해도 그렇지.....저렇게까지 노골적으로 말하는 사람은 없잖아? "가능하면 질식해 버리기 전에 터뜨려 줘라." ".............." 주어, 목적어 다 빼먹은 말이지만 나는 그 의미를 바로 알 수 있었다. "뭐....내가 상관할 일은 아니다만...." "................" "저도 그러고 싶지만......" "지독할 정도로 한 사람만을 바라보는 감정을 그 사람은 너무 잘 알거든요." "..............." "내 감정을 말해버린다면 그는 아마 나를 받아 줄겁니다." "내게 상처주기 싫어서.....아니면 지독한 연민을 느끼니까...." "그렇다 하더라도 난 기쁘겠지만....그때부터 그는 자유를 잃은 채 내게 속박되겠지요." "난 그가 불행해 지는 걸 원치 않습니다." "그 사람은 자유로운 게 어울려요." "................" "고지식한 놈...." 쓸쓸하게 웃으면서 말하는 소희를 쳐다보며 도진이 잘생긴 이마를 찌푸리면서 하얀 연기를 깊이 빨아들이더니 높낮이 없는 건조한 목소리로 내뱉듯이 말했다. "그런가요? 그래도 이게 제 방식이니까요...." 당신은 그렇게 한심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지만 그래도 이건 10년 가까이 가슴 한편을 쥐어뜯으면서 내린 결론입니다. 물론 하루에도 몇 번이나 흔들리지만요. 차라리 그를 덜 사랑했다면 두 눈 꼭 감고 이기적인 이 감정에 나를 맏겨 버릴 텐데... "넌.....사랑이 일생에 한번 뿐이라고 생각하냐?" 정말 뜬금없는 질문.... "글쎄요...." 하지만....늘 생각하고 있었던 것.... "인간이란 건 시간과 흐름과 함께 많은 것을 망각해가는 동물이니까....." "그 당시의 두근거림과 애절함을 잊어버리면 그 사람에게 사랑은 한번일 수도 있고 여러 번일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제게는....." "한번 뿐입니다." 그래....내겐 한번뿐이야. "도저히 잊혀지지가 않아요." "아니 오히려 시간이 흐를수록 이 마음은 걷잡을 수 없이 커지는 것 같습니다." "특이하게도 난 망각하는 능력을 상실한 인간인가 봐요." "아니면 지독하게 미련스럽거나......" "............." 소희의 대답에 도진은 적갈색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입에 물고 있던 담배를 계단위에 비벼 끈 뒤 투명한 눈동자로 한동안 소희를 응시하더니 희미한 미소를 띄며 말한다. "그럼 가서 잡아라." "!!!!!!!!!!" "그 자식이 속박되건....자유를 잃어버리건 무슨 상관이냐?" "가지고 싶으면 가지고, 일단 손에 넣은 뒤엔 후회할 시간 따위 없도록 만들면 되는 거다." "일생에 한번 뿐인 거라면........충분히 그럴 자격 있는 거 아니냐?" 내가 언제나 듣고 싶었던 말... 하지만 절대 들을 수 없었던 말.... 내 내부에서만 울려 대던 그 금기의 말이 도진 선배의 낮고 강한 목소리를 빌어 나를 뒤흔든다. 그래 난 항상 이 답답한 상황에서 누군가 내 등을 힘차게 떠밀어 주길 줄곧 바랬었다. 지독하게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인 말이 목까지 꽉 막혀있던 내 가슴을 순식간에 뻥하고 뚫어준다. 그와 동시에 지금껏 힘겹게 누르고 있던 내 내부의 목소리가 내 머릿속을 마구 휘젓는다. 그래. 그를 원하면 가져! 뭘 꾸물대고 있는 거야? "그리고....." "유성재가 아직도 이지후를 사랑하고 있다고 누가 장담하지?" "!!!!!!!!!!!!!" "바라보기만 하는 건 그만큼 빨리 지친다고 생각하는데...안그런가?" 묘하게 설득력 있는 말투....그 달콤한 속삭임에 이대로 넘어가 버리고 싶다. "........그 말은.....내게도 기회가 있다는 말인가요?" "..............." ".....글쎄...그건 너 하기 나름이 아닌가?..." 애써 차가운 이성으로 냉각시키고 있던 심장이 얼음의 틀을 깨고 뜨겁게 달아오른다. 미쳐버릴 것 같은 격정. 유지되어야 하는 냉정이 그 균형을 잃기 시작하면서 뜨거운 피가 꾸룩거리며 심장을 빠져나와 온몸을 덥힌다. 우리는 전시관에서 나와 지하 주차장으로 걸었다. 이 선배와 이렇게 까지 많은 말을 나눠 본건 처음이라 잘 몰랐지만 의외로 상냥한 구석에 조금 놀라버렸다. 차로 데려다 줄지는 몰랐는데.... 도진 선배의 꽃다발 가방을 뒷 자석에 싣고 조수석에 올라타는데 도진 선배의 핸드폰이 울린다. 아...지후 선배와 똑같은 모델.....커플 폰인가? "왜." 참 내.....저렇게 무뚝뚝하게 전화를 받다니.... "지금 출발하니까. 곧 도착할거다..." "그건 무리다. 지금 마트 문 닫았어....내일 해줄께." ".............." 지후 선배가 뭐라고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전화를 받고 있던 도진 선배가 약간 미간을 찌푸리더니 잠시 후 살짝 눈꼬리를 휘면서 무뚝뚝하게 내뱉는다. "칭얼대지 마라. 이지후." "가게가 문 닫았는데 나보고 어쩌라는 거냐?" 뭔가...짜증을 내는 것 같으면서도 묘하게 기뻐하는 느낌.... 이 사람도 참 모순 덩어리인 것 같다. "어쨌든 무리야....내일 해줄테니........그만......" "............." "너 그거 진심이냐?" 순간 적갈색 눈동자에 묘한 광택을 띄며 왼쪽 볼에 깊은 보조개가 생겼다. ".............." "좋아....무슨일이 있어도 오늘 먹게 해주지..." "대신.....샤워하고 얌전히 침대에서 기다리고 있어라." "............" "너나 약속 어기지마라." "절대 30분 안에 도착할 거니까, 아프기 싫으면 젤이나 준비해 놓던가...." 세상에....어떻게 저런 낯 뜨거운 말을....나라는 존재는 전혀 의식하지 않는가? "기대 되는 건 이쪽이다. 이지후." "오랜 만에 맛있게 먹어주지...." 그렇게 상당히 야한 어감의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으면서 도진 선배는 플립을 닫았다. 이럴 땐 안들은 척 하는 게 예의겠지? "내려라." "....?....." 좀 민망하기도 하고 선배 입장을 배려한답시고 일부러 창문쪽에 고개를 처박고 있는데 난데없이 고드름이 얼어붙을 것 같은 싸늘한 목소리가 들렸다. 천천히 고개를 돌려서 도진 선배를 쳐다보자 선배는 예의 그 무표정 쌀쌀맞은 얼굴로 나를 힐끗 보며 다시 말했다. "내려서 택시타고 가라고." "아.....예." 테워 준다고 했으면서 또 내리라고 할 건 뭐야? 그리고 약간은 미안해하는 얼굴을 해야 하는 거 아닌가? 보통 사람들은 이럴 때 미안하다. 집에 빨리 들어가 봐야 할 것 같아서....라고 말한다구요. 속으로 궁시렁 거리면서 차에서 내리는데 도진 선배가 차에 시동을 걸면서 말한다. "너...이 근처에 해물탕 파는 집 아냐?" "글쎄요....잘 모르......"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선배는 차를 출발시키더니 횡하니 가버렸다. 그래...저 선배는 원래 저런 사람이었어....내가 잠시 착각하고 있었던 거야. 상냥한 구석이 있다고.....개뿔 같은 소리. 지하 주차장을 혼자 걸어 나오면서 오늘 있었던 일들을 정리해 보았다. 성재형에게 현빈이를 데리고 가서 상처받은 일이랑..... 별 생각 없이 가본 전시회에서 도진선배의 그림을 보고 감동받았던 일... 그리고 정말 듣고 싶었던 말을 생각지도 않은 사람에게 들어 가슴 벅찼던 일.... 그러고 보면 오늘은 정말 많은 일이 있었다. 그래......오늘의 이 벅차고 뜨거운 감정이 식어버리기 전에 고백해버리자. 내일이 되면 후회할지도 모르지만 오늘만큼은 내 감정대로 행동하고 싶다. 어차피 형은 내게 일생에 한 번 뿐인 사람이고 나 또한 형에게 있어서 그런 소중한 사람이고 싶다. 더 이상 형의 뒷모습이 아닌 앞모습을 바라보며 살아가고 싶다. 오늘 하루만이라도 내 심장에 솔직해 지자. 그렇게 나는 오랫동안 나를 통제하고 있던 차가운 이성의 틀에서 깨어나 부화(孵化) 하기 시작했다. #교차점 성재형의 가게 문 앞에 서서 내 감정을 말로 표현하기 위해 머릿속을 정리하고 있다. 오랫동안 꿈꾸어 오던 상황이 막상 현실로 다가오자 뒤죽박죽 넘칠 것 같은 감정과 미친 듯이 뛰어대는 심장에 어떻게 내 마음을 고백해야 할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그렇게 한참 머리를 싸매고 있는데 갑자기 가게의 문이 벌컥 열리며 성재형이 나왔다. 아....... 아직 정리가 안됐는데.... "왔으면 들어오지 않고 여기서 뭐하냐?" 아까 현빈이를 두고 가서 황당했을 텐데 형은 전혀 그런 기색을 보이지 않는다. 그렇게 도망치듯이 나가고 이렇게 다시 들어올 줄이야..... 형을 따라 가게 안으로 들어가자 꽤 시간이 늦어버렸는지 손님이 별로 보이지 않는다. 비어 있는 구석의 테이블에 적당히 앉아서 담배를 입에 물자 성재형이 지포로 불을 붙여준다. 그래...나 이 사람이 불 붙여 주는 게 좋아서 담배를 배웠지.... "요즘 뭐 힘든 일 있냐?" 걱정스러운 목소리....다정한 눈동자....이걸 놓기 싫어서 그동안 그렇게 참아 왔었다. 이 사람이 내 감정으로 인해 힘들어하는 게 싫기도 했지만 사실은 성급한 고백으로 이 달콤한 것들을 잃어버릴까 두려웠던 거다. 난 언제나 생기 있고 다정한 당신이 좋았으니까.... "말하면 들어줄 겁니까" 돌이킬 수 없는 수레바퀴가 돌기 시작한다. 9년간의 쌓이고 쌓인 감정이 비명을 내지르며 뒤엉켜 내 손을 떠나버린다. 성재형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그렇게 묻는 순간 내 과거는 더 이상 과거가 아니게 되었다. "물론이지...말해봐라." 진지한 짙은 갈색의 눈동자가 다정하게 웃으며 내 다음 말을 재촉한다. 내가 고백해 버리면 당신은 어떤 얼굴을 할까? 제발 미안한 얼굴은 하지 말아 주길... 다른 말은 뭐든지 다 좋으니까 미안하다는 말만은 하지 말아주길... "나.....형 사랑해요." 마치 타인의 것처럼 낯선 목소리가 조용하게 울려 퍼진다. 이토록 짧은 말 이었던가? 하지만 지금 내 머릿속에 떠오르는 말은 오직 이것뿐이다. 9년 동안의 뒤엉킨 감정의 덩어리가 한순간에 토해졌다. 그리고......형은 말이 없다. 무거운 침묵. "꽤 오랫동안.....아니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랬어요." "내 감정이 형에게 무거운 짐이 될 수도 있다는 걸 알지만....." "................" "그래도...." "사랑합니다." 갑작스러운 내 고백에 놀란 그는 비록 침묵을 지키고 있지만 결코 내 눈을 피하지는 않는다. 그래...나는 당신의 이런 강함에 끌렸다. 어떤 상황에서도 결코 피하지 않고 그대로 부딪히는 그리고 결국 자신만의 방식으로 뛰어넘는 진정한 의미의 강함. 그 강하고 곧은 눈동자가 잠시 동안 흔들리더니 희미한 미소를 띄기 시작한다. 두근. 두근. 두근. 보기 좋은 입술이 열리면서 낮고 굵은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고맙다." "........!........." "그리고 지금까지 네 감정....눈치 채 주지 못해서 미안하다." "내가 좀 둔하잖냐......그동안 네 맘 아프게 했던 거 용서해 주라.." "..........." 거절도 승낙도 아닌 애매한 말 뒤에 숨은 의미를 파악할 수가 없다. 그 다음은? "하지만....소희야......나 사랑하는 사람 있다." 욱신. 날카로운 바늘이 심장을 꿰뚫는다. 더 이상 말하지 말아요. 형. 형 감정 다 알고 있으니까....알면서 고백한 거니까... 그러니까 제발 형 입으로 그 사람을 사랑한다는 말만은 하지 말아요. 제발 내 심장을 갈갈이 찢어 놓지 말라구요. "난 지후를 사랑해. 너처럼 꽤 오랫동안 사랑해 왔다." 쩌억. "이 말을 너에게 해야 한다고 생각해." 그래.....이것이 금기를 깨뜨린 대가다. 당신의 한마디, 한마디가 아주 효과적으로 내 심장을 찢기 시작해서 너무나 고통스러워. "어째서지요? 솔직히 제일 듣기 싫었던 말이었습니다." "안해도 되는 말이었다구요....꼭 이렇게 잔인하게 해야 했습니까?" 그의 차가운 거절에 이성을 잃어버리고 소리치기 시작했다. 가게 안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도 느껴지고 내 볼에 흐르는 뜨거운 액체도 느껴진다. 알 수가 없다. 나는 왜 이렇게 흥분하고 있는거지? 나는 왜 울고 있는 건가? 어차피 다 알고 있었던 사실이었잖아. "아니...그렇지 않아." "난 네 다정함을 이용하고 싶지 않다. 나는 네가 소중하기 때문에 그럴 수가 없어." "반쪽짜리 마음으로 널 사랑하고 싶지는 않다." 형이 내가 생각하는 것 보다 훨씬 더 나를 아낀다는 걸 깨달았지만 그것만으로 깊게 벌어진 내 가슴의 상처는 낫지 않는다. 어차피 그가 받아들여도 받아들이지 않아도 결과는 마찬가지인 고백. 안타까움과 연민으로 날 받아들인다고 해도 나는 결국 형 속에 자리 잡고 있는 지후선배의 모습에 상처받으며 살아갈 것이고 형 역시 내게 구속되어 생기를 잃어버릴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또 다른 의미로 나를 상처 입히기 싫어서 거절하면..... 거절당하면..... 내 심장이...내 가슴이....그리고 깨어져 버린 이성이 무섭게 울어댄다. 역시 현실은 드라마나 영화와는 다른 것이다. 나는 형이 지후선배를 조금이라도 잊었을 것이라는 0.1%의 확률에 내 마음을 걸었다. 그래...그것만이 내가 가질 수 있는 해피앤드. "그래요.....그렇군요." "결국 이렇게 될 거였어요." ".............." 뜨겁게 내 뺨을 흘러내리던 눈물이 차갑게 식어간다. 그리고 그 눈물과 함께 깨어졌던 냉정한 이성의 조각들이 모여 다시 그 조각을 완성한다. "하지만 후회하지는 않습니다." "가슴이 정말 많이 아프지만 형을 사랑하는 것만은 절대로 후회하지 않아요." ".............." "형이 있었기에 내가 있었고, 그래서 난 지금까지 의미 있게 살아갈 수 있었으니깐." 결국 이렇게 되어버렸지만...난 후회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날 사랑해줘서 고맙다." 미안하다는 말 대신 고맙다는 말하네요. 정말 형다워요. 그래서 좋아했습니다. 올곧은 눈동자의 장난끼도...친근한 미소도....핸섬한 얼굴도....하지만 이제 그만 볼 겁니다. "그만 가 볼께요...형." "더 이상 형을 부담스럽게 만들지 않을 자신이 생기면 그 때 다시 찾아 오겠습니다." "그때는 지금 내가 한 말 다 잊어버리고......여전히 아끼는 후배로 대해줬으면 좋겠네요." 그렇게 환하게 웃으며 그에게서 돌아섰다. 마지막으로 본 형의 눈동자가 왠지 가지마라고 붙잡는 듯한 느낌이 든다. 하지만 그것은 정말 달콤하고도 잔인한 나의 착각. 내가 만들어낸 신기루. 처음으로 마주선 교차점에서 우리는 그렇게 서로 다른 방향을 보며 등을 돌렸다. #재회 흔히 사람들은 시간이 약이라고 한다. 시간이 흐르면 모두 지워져가는 것이라고....격렬했던 사랑의 감정도.....온몸이 타버릴 것 같은 분노도 모두 세월이 흐르면 사라져 가는 것이라고..... 하지만 나는 그런 시간 흐름 속에서 제외되었다. 몇 달 동안을 가슴을 쥐어뜯으며 몸부림치다가 결국 도망치듯 입대해서 아무런 생각 없이 산 2년 2개월...제대하고 난 뒤 복학해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평범한 대학생처럼 살고 있지만 나는 여전히 그를 지우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그를 만나러 갈 수 없다. 더 이상 형을 부담스럽게 만들지 않을 자신이 생기면 그 때 다시 찾아오겠습니다. 그때는 지금 내가 한 말 다 잊어버리고......여전히 아끼는 후배로 대해줬으면 좋겠네요. 내가 해버린 불가능한 약속이 미쳐버릴 것 같은 그리움을 속박하며 하루하루 나를 갉아먹는다. 그를 잊어보려 여자친구라도 사귀어보려고 했지만 내 심장은 이미 완벽히 그의 것이라 그 어떤 매력적인 상대를 향해서도 뛰지 않는다. 후.....벌써 12짼가...그 사람만을 바라본 게. 내가 생각해도 정말 미련스럽다. 미련 곰탱이....이소희. 올 해 겨울은 유달리 눈이 많이 온다. 알바를 마치고 펑펑 쏟아지는 눈을 맞으며 소복이 쌓인 눈을 뽀독뽀독 밟으며 걸어오는데 오늘따라 서글픈 느낌이 들었다. 눈이 내려서 그런가... 이렇게 눈이 펑펑 오는 날 영화에서처럼 하얀 눈을 맞으면서 성재 형과 키스하는 게 내 소원이었는데.....아마 그런 일은 절대 없겠지? 뽀독. 뽀독. 발을 들어 내 발자국과 마주보도록 다른 발자국을 찍었다. 선명하게 찍힌 발자국을 보자 마치 성재형과 마주보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든다. 그 자리에 서서 눈을 감고 어깨로 머리위로 하얀 눈이 쌓이는 걸 느끼며 행복한 상상을 했다. 지금 내 앞에 찍한 발자국 대신 성재형이 그 자리에 서 있어서 다정하게 내 머리카락에 쌓인 눈을 털어주며 장난스럽게 웃는다. 그리고 따뜻한 손으로 차가운 내 뺨을 녹여주고는 그대로 내 입술에 감미롭게 키스한다. 유치하고 계집애 같은 생각이지만 그래도 상상 속에서 난 너무 행복하다. 이대로 눈을 뜨면 차갑고 아름다운 새하얀 세상대신 멋진 성재형의 모습이 보였으면.. "이소희." 두근. 익숙하고 그리운 목소리에 눈을 뜨자 정말로 마법같이 성재형이 내 앞에 서 있었다. 말도 안돼....이건 환상일거야....세상에 환상까지 보다니...나 드디어 완전히 미쳐버렸구나. 이 젊은 나이에 미친놈이 되다니....내 인생도 참 엿 같다. 눈에 힘을 주고 내 앞의 환상을 똑바로 쳐다보자 내 기억과는 약간 다른 성재형의 모습이다. 그 장난기를 머금은 까만 눈동자는 여전했지만 머리카락을 갈색톤으로 염색 하고 한쪽 귀에는 피어스를 하고 있었다. 예전엔 나와 키가 비슷했었는데 지금은 약간 나보다 눈높이가 높고 그리고....많이 말랐다. "성재형?" "그래...오랜만이다." 형은 약간 씁쓸한 웃음을 지으면서 기분 좋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정말 성재형? 내가 만들어낸 환상이 아니야? "독한 새끼...." "너....기다리다 지쳐서 내가 먼저 와버렸다." ".....?......." "너 정말 나 좋아한 거 맞냐? 어째 3년 동안 한번도 연락 안할 수 있냐?" 두근. 주인을 만난 내 심장이 또 멋대로 발작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와 함께 부질없는 기대도 함께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나.....3년내내 너 기다렸다." "사정이 있어서 가게 팔아치우려고 했지만 혹시라도 네가 그곳으로 찾아올까봐 끝까지 안팔고 핸드폰 번호도 안 바꾸고, 이사도 안했다." 두근. 두근. 두근. "형은......" "지후 선배를 사랑하잖아요. 그런데 왜 날 기다려요?" "................" "너 나라는 놈 잘 알잖아." "난 머리가 나빠서 직접 몸으로 깨달을 때가지는 잘 몰라. 꽤 긴 시간동안 지후 놈만 바라봐서 네가 내 뒤에 있다는 걸 몰랐다." "그렇게 그 놈만 줄창 바라봤기 때문에 녀석을 계속 사랑한다고 생각했어." 두근. "그 녀석은 내게 소중해." "하지만 네가 내 앞에서 사라지고 난 뒤, 이상하게도 가슴부근이 너무 아프더라." "아무리 기다려도 네가 날 보러 오지 않으니까 화나고 초조해서 견딜 수 없었어." "그 때 깨달았다. 어느새 난 이소희한테 길들어 졌구나하고...." "지후 놈도 소중하지만 너 역시 소중하다고....." "그리고 지후 놈이 행복해하는 것처럼 나도 행복해 지고 싶다고 생각했다." 차분한 성재형의 말투에 점점 온몸이 뜨거워진다. 아마 내 심장이 조금만 약했다면 벌써 터져버렸을 것이다. "너는 내게 공기 같은 존재야." "네가 없으면 난 살아갈 수가 없어." "그러니까 이제 그만 나한테 돌아와라." ".................." 한마디 한마디가 내 가슴을 찡하게 울린다. 벅차오르는 감동과 끓어오르는 행복감..... 이게 만약 환상이라면 나는 영원히 미쳐서 이 환상의 세계 속에 있을 것이다. "정말 잘할 테니까 널 아프게 했던 건 그 정도로 봐주고 이제 그만 나에게 돌아와." "그 말은.....형이 나를 사랑한다는 말로 해석해도 되나요?" 내 목에서 흘러나온 목소리는 완전히 잠겨서 마치 타인의 목소리처럼 들린다. 목이 메인다는 게 이런 느낌이었구나. "..............." "그래...그런 것 같다." "바보라서 잘 몰랐었는데.....그래....이런 게 사랑인가 보다." "너무 늦어버린 고백이지만.....나 유성재는 이소희를 사랑한다." 뜨거운 눈물이 시야를 가려 성재형의 얼굴을 볼 수가 없다. 안돼...사라지면 안돼...흐려지면 안돼....차오르는 눈물을 재빨리 소매로 닦아내고 눈앞에 있는 성재형의 목도리를 꼭 움켜쥐었다. "지금....이게 현실이 아니라고 한다면...난 당장 이 자리에서 죽어 버릴겁니다." 내 절박한 말에 성재형이 빙긋이 웃으며 말한다. "이건 현실이야....이소희." "그러니까 죽는다는 소리 하지마라." 형은 다정한 목소리로 말하며 내 머리카락에 쌓인 눈을 털어주고는 그 부드러운 손을 얼굴로 내려서 내 뺨을 감싼다. 상상 속과는 달리 그의 손은 내 얼굴보다 더 차게 얼어 있다. 내 손을 그의 손에 겹치면서 물었다. "왜 이렇게 손이 찬 겁니까?" "........너희 집 앞에서 꽤 오랫동안 기다렸거든....어느새 얼어버렸나 보네." ".............." "키스해도 되냐?" 환하게 웃으며 내 동의를 구하는 성재형을 바라보며 나는 살며시 눈을 감았다. 그의 입술에선 짙은 담배향이 났다. 그 담배 향을 천천히 맛보면서 그의 입안에 혀를 넣자 따뜻한 것이 나를 강하게 감아온다. 마치 섹스를 하는 것처럼 완벽하게 결합되어 떨어질 줄 모르던 혀들은 서로 뒤엉키며 끈적한 타액을 만들어내고 격렬한 감정을 토로하는 몸짓을 해댄다. 함박눈을 맞으며 하는 격정적인 키스.....오늘에서야 내 소원이 이루어졌다. 당신을 만나서 행복합니다. 긴 사랑의 아픔 속에서 당신을 포기 하지 않아서 다행입니다. 당신처럼 멋진 사람을 사랑할 수 있어서 행복합니다. 멀리 돌고 돌아서 그 길고 긴 기다림 끝에 마침내 당신은 날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일상 "아윽.....형 그만...." "조금만 참아 이제 거의 다 들어 갔으니까..." 살을 뚫고 들어오는 날카로운 고통에 선재형의 허벅지를 꼭 쥐었다. 젠장...이거 왜 이리 아픈거야? "툭." 살이 터지는 소리가 들리며 따뜻한 것이 흘러내리는 게 느껴진다. 젠장...피까지 보다니.. "형. 하나도 안 아프다고 해잖아...피까지 보게 하고 뭐야?" "이제 거의 다 뚫렸으니까 진짜 안 아플거다. 엄살 되게 심하네.." "투툭.." 완전히 살이 뚫렸는지 투박한 소리가 나면서 핏방울이 떨어진다. 나는 소리만 들어도 끔찍한데 어떻게 형은 태연하게 남의 살에 구멍을 낼까? 하긴...옛날부터 피 보는 건 엄청 좋아했었지.... "다됐다." 형이 내 귀에서 손을 떼며 물 티슈로 귓바퀴를 닦아준다. 귓가가 얼얼한 게 도무지 감각이 없어서 손을 대어보자 퉁퉁 부어오른 뜨거운 살덩이가 느껴진다. "내가 했지만 진짜 예쁘게 잘 뚫렸다. 거울 볼래?" 형이 가져다 준 손거울을 쳐다보자 빨갛게 부풀어 오른 귀 위에 은색의 구슬이 박혀있다. 형과 똑같은 모양의 피어스....고통스럽긴 했지만 이걸 보니 왠지 뿌듯하다. "너처럼 엄살 심한 놈 처음 봤다. 시작하기 전에 얼음으로 충분히 식혀줬잖아." "진짜 아팠단 말이야. 형." "혹시 한번에 뚫으려고 송곳으로 쑤신 거 아냐?" "................" 내 말에 성재형이 시선을 피하면서 재빨리 손으로 무언가를 숨긴다. "뭐야? 진짜야?" "형. 사람 잡으려고 작정했어?" "................" "어차피 서서히 구멍 넓혀가야 할 텐데...한번에 뚫어버리면 나중에 안 아프잖아." "형!" 세상에....기가 찬다. 형의 대범한 모습을 좋아하긴 하지만 이건 대범을 넘어서서 무식한 거라구.... "나한테 깔릴 때는 잘 참더구만 내꺼 수천분의 일도 안되는 그깟 송곳에 비명을 지르냐? 쪽팔리게 시리..." 이 무심한 사람 같으니....비교할 걸 비교해야지....정말 어이가 없다. "형 그건 경우가 틀리잖아!" "틀리긴 뭐가 틀리냐? 살 뚫는 건 다 똑같지." 기가 찬 걸 넘어서서 이제 화가 난다. 어떻게 송곳이랑 자기 걸 비교할 수 있어! "틀려! 형 건 아무리 커도 안 아프다구!" "................" 이런......흥분한 나머지 이상한 말이 튀어나가 버렸다. 이런 말을 하려던 게 아니었는데.... 어떻게든 수습해 보려고 성재형 쪽을 살피자 형은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한참동안 멍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더니 시트를 움켜지면서 부들거리기 시작한다. "푸하하하하하하하하!" "웃지마. 형. 내말은 그런 뜻이..." "크크크크큭!" 시트를 잡아 뜯으며 웃어대는 형을 보자 너무 쪽팔려서 온몸의 피가 얼굴로 모였다. 사람을 미치도록 민망하게 하는 웃음.......그러고 보니 중학교 때 내 이름을 듣고 벽을 벽까지 긁으면서 웃던 사람이었지....아무래도 이번이 더 심각한 것 같다. "그러니까....형. 내 말은 그게 아니라니까.." "킬킬킬킬." 아주....시트가 찢어지겠다. 형. 그 말이 그렇게 웃겼어? 형의 다양하고도 끊이지 않는 웃음소리를 듣자 나는 상황을 수습할 마음이 싹 사라졌다. 사실.....형하고 섹스할 때 아프지 않은 게 아니다. 처음에는 정말 몸이 쪼개지는 줄 알았고 지금도 형의 것이 내 안으로 파고 들 때마다 하반신을 압박하는 엄청난 고통에 입술을 깨문다. 하지만 형이 내 몸에 들어오는 순간 왠지 그것이 내 속에 녹아 들어가는 느낌이 들어서.......마치 내 일부분이 된 것 같아서 별 이물감 없이 받아들일 뿐이다. 그래...난 형을 사랑하니까....그 고통이 아프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뿐이야... 송곳같이 단순하게 나를 꿰뚫는 차가운 물질이 아니라 따뜻하고 강한 형의 일부라서 아프지 않은 거라구....물론 그 뒤에 찾아오는 쾌감이 고통을 상쇄시켜줘서 그렇게 느끼는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은 이런 거였단 말이야. "크크크큭....이소희.....너 정말 걸작이다." "..............." 한참 미친 듯이 웃던 형은 눈꼬리에 눈물까지 달고 말한다. 살다 살다 형 눈물 보는 날이 올 줄은 몰랐는데..... 기쁘기도 하고 착찹하기도 하고... 근데 정말 언제까지 웃을거야? "너...말이야....내 것이 아무리 커도 안 아프면 아무리 많이 해도 상관없겠네?" "....!...." "아....정말 다행이다. 난 정말 행복한 놈이야." 환한 미소를 지으면서 형은 나를 끌어당겨 침대위에 쓰러뜨리고는 내 위로 올라왔다. 정말 어떻게 하면 저런 단순한 머리구조를 가질까? 아까 좀 무리해서 거절하려고 했지만 저 장난기 가득한 사랑스러운 눈동자를 보니 차마 그럴 수가 없다. 성재형은 눈으로 말없는 동의를 구하더니 곧 혀로 내 유두를 희롱하기 시작한다. "이소희......아프면 소리 질러도 된다." "안 아프다고 했잖아!" "크큭....알아....그래도.....난 듣고 싶어....그러니까 참지마." .................. 형은 그렇게 말하면서 내 다리를 벌리더니 손가락을 애널 속으로 집어넣곤 부드럽게 내벽을 자극하기 시작한다. 음.....기분이 너무 좋다. 한참동안 내벽을 긁어대던 손가락이 애널을 빠져나가자 곧 굵고 뜨거운 것이 부드럽게 내 안으로 들어왔다. "아윽..." 조금 전의 행위로 인해 충분히 벌어 졌을 텐데.....찌릿찌릿한 고통이 느껴진다. 최대한 다리를 벌리고 형이 들어오기 쉽게 엉덩이를 들자 굵은 불기둥이 한번에 깊숙이 찔러온다. "헉....아읏....." 형이 움직일 때마다 굉장한 압박감과 함께 쾌감이 밀려온다. 그래...이 가득찬 느낌이 좋아. 그와 완벽하게 하나가 되는 느낌... 밀어치는 쾌감의 파도에 몸을 맏기며 나는 정신없이 허리를 흔들었다. 절정.... 희열.... 그리고 온 몸을 태우는 쾌감. 그를 받아들이기 전에는 언제나 갈구했지만 결코 맛볼 수 없었던 금단의 감정들이 나를 마구 잡아 흔든다. 땀방울이 주위로 흩어지고 완전히 결합된 장소에서 나는 야한 소리가 우리의 행위를 부추긴다. 서로를 향한 거칠고도 뜨거운 몸짓. 내 두 다리는 허공에서 흔들거리고 서로의 입에선 새된 교성이 흘러나온다. 그 거친 동물적인 몸부림의 끝에 찾아오는 조그만 떨림..... 사정의 그 순간, 그도...나도....머릿속이 텅 비어 버리는 것을 느꼈다. 맞잡은 손과....얽혀져 있는 다리....끈적하게 흐르는 땀과 비릿한 정액의 냄새 속에서 우리는 아찔할 정도의 황홀감과 편안함을 동시에 느낀다. 모순된 감정들... 내가 오랫동안 품어왔던 냉정한 이성과 거부해왔던 뜨거운 열정... 사랑이란 건 언제나 이런 모순된 감정을 함께 지니고 있나 보다. 하지만 나는 그것을 알지 못한 채 서로를 위한 다는 명목으로 냉정을 선택했다. 오랫동안의 기다림과. 상처 그리고 안타까운 그리움. 나는 그 때 열정 대신 냉정을 택했기에 지금 그를 이토록이나 사랑하는 것일까? 아니면 냉정을 선택해버렸기에 그동안 그렇게 아팠던 것일까? "사랑한다. 이소희." 아직까지 빨갛게 부풀어 있는 내 귓가에 그가 다정하게 속삭인다. 그래....이젠 아무래도 좋아.... 내 일생에 한번뿐인 당신에게 나 또한 그런 존재가 될 수 있다면.... 사랑하는 이에 대한 냉정은 이성의 마지막 편린이며 심장을 찢는 최고의 배려이다.